자세히보기 2015년 12월 1일

명사의 고향을 가다 | “나는 참 행운아다. 살아생전 너희를 만났으니” 201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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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고향을 가다 | 이충희 인하대 명예교수

“나는 참 행운아다. 살아생전 너희를 만났으니”

인하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인 이충희(李忠熹) 박사는 스스로 행운의 사나이라고 자처한다. 북한에서 1·4후퇴 때 아버지와 단 둘이 월남하여 풍찬노숙하였지만 지금은 부인과 아들, 딸이 모두 건강하고 손자손녀들이 우글우글하기 때문에 천주님께 늘 감사하고 있다. 그러던 그에게 얼마 전 뜬금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충희 박사님 맞으시죠? 축하합니다. 오는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될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2차 상봉단으로 결정되셨습니다. 북한에 장조카 한 분이 살아 있어 추첨에 의해서 상봉이 결정되어 금강산에 가시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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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가 생시인가. 세 살배기 형님 딸이 살아있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오래 전에 해두었지만 그 일은 로또에 당첨되는 일 만큼이나 까다롭기 때문에 그냥 잊고 있었다. 그런데 60년도 훨씬 전 북한을 떠나올 때 세 살배기 아기로만 슬쩍 스쳐보았던 형님의 첫째 딸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약국을 하고 있는 부인에게 얘기를 했더니 “아이고, 북쪽에는 약도 귀하다는데 저는 약부터 챙길게요.”라고 하면서 소화제부터 두통약, 감기약, 설사약, 멀미약 등등 온갖 약들을 챙겼다. 그리고 백화점에 가서 세일하는 두툼한 방한복과 내복, 아이들이 즐겨 입을 만한 아웃도어웨어를 한 아름 사들고 들어왔다. 옷값만 해도 2백만원이 넘는다고 하면서도 아내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이충희 박사는 좋아하는 소주를 두 병이나 마시면서 꿈결처럼 흘러가버린 그 시절을 회상해보았다. 어느 드라마가 그렇게 요란할 것이며 어느 영화가 그렇게 극적일까. 대한민국의 실향민 치고 그런 드라마, 그런 영화 한 편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겠지만 황해도 해주사범학교를 다니던 이충희 소년이 겪었던 드라마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기막힌 인생 드라마이다.

1950년, 그때만 해도 안내인을 잘 만나면 38선 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충희 소년은 노력동원도 없고, 군사훈련도 없는 개성사범학교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무작정 남행을 시작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일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생전 보지도 못하던 소련제 탱크가 덜덜거리며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야포를 끄는 인민군의 포병마차들이 대포와 함께 탄환을 싣고 남쪽으로 내닫고 있었다. 그가 머물고 있던 옹진군 해남면 바닷가 사람들은 남쪽으로 가야 산다고 하면서 배를 타고 저마다 남쪽으로 향하였다. 미군들의 비행기가 이미 북쪽 하늘에 나타나 폭격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 북새통에 몸이 아픈 친구 하나와 충남 서산군 대호지면에 배를 타고 상륙하였다. 마음씨 좋은 충청도 사람들은 북쪽에서 난데없이 내려온 황해도 소년 둘을 먹여 주고, 겨울옷을 입고 내려온 두 소년에게 여름을 지낼 수 있는 가벼운 옷도 전해주었다. 하필이면 그 집이 면장 댁이었다. 이충희 소년은 자진해서 면장 댁의 머슴 노릇을 하였다. 그러던 중 어제까지 대한민국 서산군 대호지면 면장이던 집주인이 인민위원장이라고 하면서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동분서주하였다. 그 면장은 자신이 할당 받은 인민군 숫자를 채워야 하니까 열일곱 살짜리 이충희 소년에게 인민군으로 나가라고 재촉하였다. 몸이 아픈 친구는 열에 들떠 그냥 자리에 누워 있었고 이충희 소년은 대호지면 사람들과 열을 맞춰 조치원 쪽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충희 소년과 나란히 걷는 남씨라는 성을 가진 남자는 계속 울면서 걸었다.

이충희 소년이 물었다. “남씨는 왜 그렇게 울기만 해요? 이렇게 된 걸 누구에게 탓하겠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지요.” 그제야 남씨는 울음을 그치며 말했다. “너는 아직 어려서 이 마음을 잘 모를 거야. 난 일주일 전에 결혼을 했단 말이야. 우리 색시가 얼마나 예쁘고 마음씨가 착한데. 그 착한 색시도 없는 이 뜨거운 길을 정처 없이 걸으려 하니 눈물이 나겠니, 안 나겠니? 더구나 우리가 훈련을 받고 나면 저 남쪽 어딘가로 끌려가서 밤낮없이 싸우다가 죽을 텐데 내가 서럽지 않겠니? 아이고 보고 싶어라. 내 예쁜 색시.”

그런데 그날 저녁, 날이 어둑어둑해질 즈음, 선두에 섰던 인솔자가 소리쳤다. “적기다! 양키 놈들의 비행기다! 전원 엎드려! 움직이지 말고 엎드려!” 이충희 소년은 남씨에게 말했다. “남씨, 지금이 기횝니다. 저 논둑 낭떠러지 밑으로 굴러 떨어집시다.” 남씨도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폭격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낭떠러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충희 소년과 남씨는 걸어 걸어 서산군 대호지면까지 왔는데 그 사이에 또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그 요란한 드라마 속에서도 세월은 흘러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있던 대호지면 면장은 다시 면사무소에 나가 태극 깃발을 옥상에 올리고 있었다. 이충희 소년이 유엔군이 들어와 있는 인천에 올라가겠다고 하니까 면사무소 직원들은 모두 나와 애국지사를 송별하는 것처럼 이충희 소년의 허리에 태극 깃발을 감아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한 편의 코미디일까. 아니면 장난기가 심한 신의 짓궂은 드라마일까.

인천에 도착하니 황해도 사람들이 해안가에 천막을 치고 모여 있었다. 황해도 말씨를 쓰는 이충희 소년은 배를 타고 다시 고향 황해도로 돌아갔다. 이충희 소년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 가좌면 오봉리라는 곳이었다. 집에 돌아가니 난리통에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농사를 짓던 형님은 마을의 인민위원장을 지냈기 때문에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평양 쪽으로 사라졌고,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수와 어린 조카딸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잘 먹지 못한 그 조카딸은 시도 때도 없이 울기만 하였다.

그때 국군을 따라 들어온 서북청년단원들은 젊은이들의 힘만으로 지역의 치안을 담당해야 한다고 하면서 반공청년들로 조직된 8240부대를 만들었다. 당시 연대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나중에 중앙일보 사장이 된 이현우라는 청년이었고, 참모 중에는 훗날 셋방여행사 회장이 된 오세방이라는 청년도 있었다. 모두 미군이 전해준 카빈이나 M1 소총을 들고 벽성군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며 인민군 패잔병이나 적 치하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적색분자들을 찾아 군이나 경찰에 인계해주는 일을 담당했다.

고향 황해도의 율곡 소현서원, 유네스코 등재 추진

그렇게 정신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눈발이 날리면서 중공군들의 피리소리가 들리고 압록강까지 북상했던 국군이나 유엔군들이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열여덟 살이 된 이충희 소년은 코 밑에 돋아나기 시작한 수염을 깎지도 못한 채 아버지와 단 둘이서 서울을 거쳐 1·4후퇴의 눈길 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인민군과 함께 사라진 큰아들을 기다려야 하고 할머니의 상청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고 고향 집에 남았다. 형수님과 세 살짜리 조카는 눈길 속에서 살아남을 자신도 없거니와 집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형님을 기다려야 한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남으로 내려온 아버지는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돈을 모아 이충희 청년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그 깊은 뜻을 알기 때문에 이충희 청년은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주임교수는 마침 대만대학교에 박사 코스가 열려 있으니 가서 열심히 공부해보라고 격려해주었다. 중국 역사 과정 중에 당나라에 관한 연구 결과는 많지만 송나라에 대한 연구 결과물이 의외로 많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송나라 문화 연구에 심취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하대학교에 출강하면서 대학 앞에 있는 약국에 들어가 눈병에 관한 약을 사게 되었다. 부잣집 출신의 순진한 여약사는 외롭게 공부하며 시간강사 가방을 들고 다니는 그 착한 청년을 동정하게 되었다. 피로회복제도 공짜로 주고, 소화제도 거저 주면서 나중에는 사랑까지도 듬뿍 전해주어 결국 결혼을 하였다. 그 마음씨 좋은 여약사의 정성 덕분이었을까, 이듬해 전임 발령이 나고 이충희 청년은 교수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이 교수는 인하대학교에서 사학과 학과장, 문과대학 교학부장을 거쳐 인하대학교 부설 인문과학연구소장까지 역임하고,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하였다. 그는 퇴임 후에도 여러 대학의 뜻있는 교수들과 힘을 합쳐 ‘남북동질성연구회’라는 학술단체를 만들고 하와이대학과 LA주립대학, 그리고 연변대학교와 연대하면서 남한과 북한의 동질성에 대한 연구를 오랫동안 해왔다. 특히 그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황해도 벽성군에는 율곡 선생의 소현서원(紹賢書院)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그 소현서원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일도 북한 측과 여러 번 상의하면서 추진해왔다.

금강산에 울려퍼진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번에 금강산에서 만난 조카딸은 6·25가 나기 전 얼핏 보았던 세 살짜리 아기였다. 형님의 딸로 빼빼 마른 채 한없이 울기만 하던 그 아기가 칠순의 할머니가 되어 이충희 교수 앞에 나타났다. 이 교수는 집안 사정부터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전쟁 후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셨다. 형님은 무사히 돌아와 꽤 장수를 하였는데 전쟁 중에 너무 고생을 한 형수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후에는 형님이 새 살림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들었다. 칠순의 조카 내외는 이충희 교수가 술을 권하자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정신없이 받아 마시고는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홍난파의 ‘봉선화’도 부르고,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도 불렀다. 그러다가 술기운이 더 돌자 이 교수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소리쳐 불렀다.

이 교수가 슬그머니 물었다. “이 노래는 남쪽에서 만든 노래인데 불러도 괜찮니?” 조카사위는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일 없시오. 괜찮습네다.”를 외쳐대며 신나게 어깨춤을 추었다. 남쪽에서 준비해간 선물은 맨 마지막 날 이충희 교수 내외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찾아와서야 받아갈 수 있었다. 선물을 풀어 보며 조카 내외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참, 남쪽으로 내려가신 할아버지는 어디에 모셨습네까?” 이 교수는 차분하게 알려주었다. “그 어른은 생전에 근검절약하시며 북의 식구들을 만나게 되면 함께 모여 살 터전을 마련해야 된다, 하시면서 서울 밑에 있는 용인이라는 곳에 3만 평의 땅을 준비하셨단다. 2만 평은 우리 남북의 가족이 모여 살 터전으로 남겨 놓으셨고, 1만 평은 논인데 그곳에서 나는 쌀만 가지고도 우리 가족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는 규모란다. 그 어른은 그 2만 평의 선산 가운데에 누워 계시지.”

조카딸이 놀라며 물었다. “삼촌, 남쪽에서는 개인이 3만 평이나 되는 땅을 가질 수 있습네까?” 이 교수는 큰소리로 말했다. “3만 평이 아니라 3십만 평, 3백만 평도 돈만 있으면 가질 수 있지. 통일되기만 기다려라. 통일이 되면 아버님이 누워 계신 그 땅에 모두 모여서 집 짓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도 만들어 마음껏 뛰어놀게 해보자.” 조카사위는 다시 신이 나서 방에 있는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면서 어깨춤을 추었다.

이 교수 내외가 준비해간 봉투를 내밀었다. 내외는 봉투를 열어보고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격해하는 눈치였다. 통 큰 이 교수가 안타깝게 말했다. “이게 다 너희들 살림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만….” 조카 내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경비는 제해야지요. 여기 올 때 들인 여비하고, 우리들이 맞춰 입고 온 옷값하고, 당에 감사하는 성금은 내야하겠지요.”

이야기는 그쯤에서 그치고 일행은 다시 한 번 얼싸 안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소리 높여 불렀다. 이 교수가 끝으로 한 마디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참 행운아다. 살아생전 너희들을 만났으니. 내 나이 여든하고도 절반쯤이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내가 제일 어리더구나. 그래서 송구했다. 지금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나보다 더 나이 드신 어른들이 마지막 남은 힘으로 살아 있는 혈육들을 그리워하며 만날 그날 그 순간을 고대하고 있는데….”

창밖에서는 금강산의 낙엽 떨어지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작가 김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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