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6년 1월 1일

영화리뷰 | “각자 혁명의 길은 따로 있다” 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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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

“각자 혁명의 길은 따로 있다”

 

CS_201601_74비교사회주의 연구에서 북한과 유사성이 가장 높은 국가로 거론되는 것이 루마니아다. 보통 동독사례가 많이 회자되지만 동독은 북한과 많이 달랐다. 루마니아는 그 독재체제 성립과정이 북한과 가장 유사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인 차우체스쿠는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모델삼아 27년간 루마니아를 지배하고, 동구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수령식 개인숭배체제를 구축해 갔다. 그리고 1989년, 루마니아를 포함한 전 세계인들은 독재자 차우체스쿠가 혁명에 의해 물러나는 것을 생방송으로 목격했다.

 

‘128, 당신은 부크레슈티의 동쪽에 있었습니까?’

루마니아 혁명은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리고 16년의 세월이 흘러 1989년 혁명 당시를 회상하는 영화가 루마니아에서 제작되었다. 2006년 제작된 영화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루마니아 혁명에 대한 기억을 루마니아의 작은 도시에서 끄집어냈다. 영화의 원제는 <A Fost Sau N-A Fost?, 12:08 East Of Bucharest>로 ‘12시 8분, 당신은 부크레슈티의 동쪽에 있었습니까?’이다. 제목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나 다름없다.

영화는 12월 22일 부크레슈티 동쪽의 작은 도시 방송국에서 당시의 혁명을 회상하면서 이 소도시에서도 혁명이 있었는가의 유무를 놓고 진행되는 이야기다. 지방방송국 사장이자 프로그램 진행자인 비르질은 루마니아 혁명 16주년을 맞아 혁명이 있었던 1989년 12월 22일 12시 8분에 지역에서 어떤 혁명적 행위가 있었는가를 놓고 생방송을 진행한다. 두 명의 패널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그 지역의 오랜 토착민 노인인 비스코치다.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행사에 다니는 일을 하고 있다. 다른 한명은 술주정뱅이 역사 교사인 마네스쿠다.

생방송 토론에서는 연신 웃지 못할 상황들이 연출된다. 토론자 중 한 명은 앞에 놓인 토론지로 계속 종이비행기를 접고, 다른 한 명은 술을 따라놓은 컵을 연신 들이키며 종이를 갈기갈기 찢는다. 두 출연자인 비스코치와 마네스쿠는 혁명을 바라보는 일반인과 지식인의 입장을 대변한다. 마네스쿠는 제법 엄숙하게 혁명의 의미와 혁명에서 자신과 같은 지식인들의 선구적 역할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실시간 전화통화에서 그의 말과 상반된 증언들, 즉 독재자가 도망갔다는 소식이 들리기 전부터 몇 명이 모여 혁명을 준비했다고 하는 마네스쿠의 말이 거짓이라는 증언이 속출했다. 특히 전직 비밀경찰이자 현재는 중소기업의 사장이라고 자신을 밝힌 베잔은 마네스쿠의 증언이 완전 거짓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마네스쿠를 긴장시킨다. 베잔은 체제전환 이후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노멘클라투라의 전형적인 모습을 점잖은 대화를 통해 보여 준다. “난 항상 어디서든 수석을 했기 때문에 비밀경찰이 되어 맡은 바를 충실히 해냈고 그걸 부끄러워해본 적이 없습니다.”

 

독재자 시절이 좋았지. 무슨 얼어 죽을 혁명이야

토론은 결국 마네스쿠가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 혁명의 광장에서 혁명을 주도하지 않았다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점점 수세에 몰리는 마네스쿠는 결국 혁명전이나 혁명후나 바뀌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서 진행을 맡고 있는 방송국 사장 비르질과 베잔에게 심드렁한 심기를 드러낸다. “어떤 놈은 과거 비밀경찰의 회계원이었는데 지금은 중소기업 사장이고, 당신은 과거 방직공이었는데 지금은 방송국 사장이고, 난 우주비행사나 되어야겠네.” 막장분위기의 토론 말미에 시청자가 한마디 한다. “독재자 시절이 좋았지. 무슨 얼어 죽을 혁명이야. 그 놈들 다 거짓말쟁이야.”

감독인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영화의 영상은 다소 어두우면서도 차분한 동유럽 소도시의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른바 루마니아식 리얼리즘의 미학으로 채색되어 있다. 인적 드문 소도시의 새벽과 저녁 무렵의 어둑어둑한 장면으로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했다. 고풍스런 유럽식 도시의 수수한 미관을 배경으로 한 가로등 점멸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장면이다.

영화에서 독재자 정권의 몰락이라는 거창한 혁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혁명 순간에 대한 개인적 추억의 편린만이 오갈 뿐이다. 영화는 혁명을 역사적 실체로서의 거대 담론이 아니라 지극히 미시적 차원에서 응시한다. 독재자 타도 이후에 사람들이 광장에 몰려나왔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는 비르질의 말에 비스코치가 대답한다. “혁명은 등불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티미소오라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죠.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혁명을 만들어냅니다. 각자 혁명의 길이 따로 있어요.”

 

서유석 / 북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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