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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고향을 가다 | “형수님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남한에 왔으랴” 201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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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고향을 가다 | 최은범 국제인도법연구회 대표(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고문)

형수님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남한에 왔으랴”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청에 있는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는 최근 590쪽이 넘는 방대한 이산가족 백서를 펴냈다. 제목은 <2015 이산가족 70년>.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위원장 이상철)는 광복 70주년인 올해를 이산가족 70년의 해로 고통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한마디로 1945년 광복의 해를 맞은 그때부터 우리 민족에게 이산의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 책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편집책임자가 되어 펴낸이는 함경북도 명천군 태생의 최은범 고문이다.

최은범 고문은 1934년생으로 올해 만 81세의 노인이다. 2013년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이산가족 70년사를 회고하며 더 늦기 전에 관계자들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몸은 바짝 말라보이고 노인 티가 나지만 아주 결기가 있고, 함경도 사나이답게 집념과 끈기를 자랑하는 구석이 있다. 또한 힘이 있어 끝내 엄청난 분량의 ‘이산가족 70년사’를 펴낸 것이다. 그는 자신이 뼈아픈 이산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이산문제를 단순히 실향의 문제나 혈육이 떨어져있는 가족사의 문제를 뛰어넘어 인간의 보편적 권리까지도 무참히 파괴하는 인류사의 문제로 보고 있다.

함경북도 명천을 얘기할 때 우리 세대들은 옛날 교과서에서 배웠던 명태 얘기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명태라는 생선의 이름이 왜 생겼느냐? 교과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명천에 사는 태서방이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아 끓여 보았더니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사람들은 그 생선의 이름을 명천의 명자를 따고, 태서방의 태자를 따서 명태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ITV_201503_20명태와 정어리의 고장 명천을 뒤로 하고…

그 옛날 구전으로 전해 내려 온 황당한 이야기일 터이지만 어쨌든 일제강점기까지 함경북도 명천군의 앞바다에서는 명태와 정어리가 많이 잡혔다. 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는 도루묵이라고 부르는 은어가 지천으로 잡혔다. 함경도 바닷가, 특히 명천군 일대의 바닷가에는 언제나 명태를 말리는 덕장과 정어리 기름을 짜는 공장이 수도 없이 있었고, 은어를 잡아 파는 어시장이 북적거렸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나자 이상하게도 그렇게 많이 잡히던 명태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정어리와 은어 떼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고기떼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 놈들보다 더 무서운 공산당이 들어오자 고기떼도 무서워서 도망갔다.”

최은범 소년의 집은 농토를 5정보(약 5만㎡) 이상 가진 지주였다. 공산당이 들어오자 1946년 봄에 토지개혁이 실시됐고 은범 소년의 가족은 집은 물론 소와 쟁기, 농토까지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소년시절 공심산이라고 부르던 뒷산에 올라가 마음껏 뛰어놀고, 여름이면 마을 옆을 휘돌아 흐르는 화대천에 뛰어들어 마음껏 미역을 감고, 한나절만 걸으면 금방 나오는 바닷가로 친구들과 달려가 풍덩하던 그 모든 아름다운 추억을 고스란히 빼앗긴 채 성진시내로 쫓겨 갔다.

공산당이 들어오고 도시 이름마저 김책시로 바뀐 그 성진에서 더 이상은 견디기가 어렵게 되자 1947년 형님 내외는 서울로 떠났다. 일제 때 애국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숨진 누나와 매형 내외는 딸 하나를 남겨놓고 해방의 기쁨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공산당원들은 매형 내외가 남긴 딸 하나를 애국열사의 자손이라고 하여 평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애국열사 가족들의 자녀들만 다닌다는 만경대학원에 입학시켰다. 그 어린 조카가 퍼런 군복을 입고 성진시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외할머니인 은범 소년의 어머니는 그 군복 입은 외손녀를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다.

서울로 내려갔던 형수가 1948년 11월에 불쑥 나타났다. 서울에서 나은 돌 지난 딸을 업고 머리에는 어마어마한 보따리를 이고 성진의 집에 나타난 것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형수에게 물었다. “서울은 어떻소? 미국 놈들이 들어왔다는데 여자들을 가만히 놔둡니까? 여기는 로스케(소련군인)들이 들어와 여자라고 생긴 것들은 모조리 잡아다가 욕을 보였는데….” 형수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미국 군인들은 그런 여자들만 찾지요. 부대 옆에 서서 몸 파는 여자들 말이에요. 그냥 여염집은 찾아오지 않아요. 대신 그 사람들 옆에 있으면 물건이 많이 생기지요. 자, 보세요. 제가 가지고 온 이 설탕, 그리고 이 다이아찡, 그리고 칫솔, 치약, 이게 다 미제물건들입니다. 아 참, 이게 미제 전구인데 아주 튼튼해서 10년도 넘게 간다고 합니다. 살 분들은 어서 사가세요.”

동네 사람들은 숨겨놨던 돈들을 모두 챙겨가지고 나와 형수가 가지고 온 미제 물건들을 사갔다. 특히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던 다이아찡이라고 하는 그 알약은 순식간에 팔렸다. 형수는 그 다음 날부터 남쪽에서 잘 팔린다는 마른 오징어와 북어, 그리고 명천 무수단 앞바다에서 잘 잡히는 곤포(다시마) 말린 것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얘야, 그런 물건들을 들고 다니면 단속하는 사람에게 걸리지 않느냐? 기차 타고 다닐 때 잡히지 않겠느냐?” 당시 29세로, 형님과 동갑이었던 형수님은 작은 체구에 힘도 셌다. “아버님,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굽니까? 함경도 여자 아닙니까? 다 알아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차는 아직도 38선까지 무사히 다닙니다. 원산까지만 가면 일사천리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은범이, 채숙이를 잘 부탁한다”

유학자인 아버지 최종락 옹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하셨다. “그래, 우린 너를 믿는다. 너는 꼭 신라시대의 선덕여왕 같구나. 당태종도 꼼짝 못하게 기로 눌렀던 그 선덕여왕 말이야. 암, 너는 우리 집안의 선덕여왕이지. 이번에 데리고 내려갈 네 시동생 은범이와 시누이 채숙이를 잘 부탁한다. 곁에서 눈물을 흘리며 맏며느리 어깨를 쓸어주던 시어머니 그러니까 은범 소년의 어머니인 김정옥 여사가 맏며느리에게 불쑥 한마디를 했다. “얘야, 네가 이번에 내려가면 늙은 우리들은 다시 만날지 못 만날지 기약을 할 수 없으니 이거라도 가지고 가거라.” 그러면서 어머니는 형수에게 가보로 남은 재봉틀 한 대를 내주셨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내가 우리 시어머니로부터 가보로 물려받은 일제 싱거미싱이다. 우리집 재산목록 1호지. 공산당 놈들도 기와집과 농토, 농기구, 황소를 다 빼앗았지만 이것만은 눈 감아 주었지. 자, 가지고 가거라. 긴하게 쓰일 거다.”

충주 최씨 가문의 선덕여왕은 싱거미싱을 번쩍 안아 머리에 이었다. 그리고 1948년 11월 초, 찬바람이 부는 성진역에서 기차를 잡아타고 남행을 시작하였다. 선덕여왕은 머리에 싱거미싱을 이고 등 뒤에는 갓 돌이 지난 딸 하나를 들쳐 업고 있었다. 여동생 채숙이가 경란이라고 부르던 그 조카에게 줄 분유와 미숫가루를 들고, 은범 소년은 형수님이 남쪽에 내려가 팔아야 할 말린 북어와 오징어, 그리고 다시마를 등에 진 채 손에는 자신이 갈아입을 내복과 비상식량을 챙겨 들고 따랐다. 기차가 원산역에 닿았을 때 남쪽에서 선덕여왕을 안내하고 왔던 중년남자가 또 다른 월남민 대여섯 명을 끌고 기차에 올랐다. 일행은 모두 12명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남한으로 탈출하는 인파들이 경원선 열차를 타고 버젓이 내려올 수가 있었다. 간이역에서 보안대원들이 가끔 올라와서 검문을 하였지만 그때는 모두가 38선을 넘어 남쪽에 내려가 장사를 하고 북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사들고 올라오는 때였기 때문에 엄청난 분량의 짐을 이고, 지고,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시비하지 않았다.

그래도 노련한 안내인은 12명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기차가 닿는 곳은 연천입니다. 그러나 종착역인 연천에는 보안대원들이 많으니 우리는 한 정거장 앞에 있는 대광리에서 내릴 겁니다. 제 말을 잘 따라주세요.” 안내인의 말대로 일행은 대광리에서 내렸고 슬쩍 서쪽 문산 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한탄강 쪽으로 향하였다. 1948년 11월 7일로 은범 소년이 기억하고 있는 그날, 한탄강가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 있었고 얼음 비슷한 농무가 끼어 있었다. 남자들은 팬티만 남기고 모두 하의를 벗어 머리에 얹고, 여자들은 속바지만 입은 채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2살짜리 조카였다. 강가의 북한 초소에서 초병들이 오고 가는 모습이 어슴푸레하게 보였지만 일행은 속도를 내어 150m나 되는 한탄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초인적인 선덕여왕은 싱거미싱 위에 조카를 올려놓고 헉헉거리며 강을 건넜다. 천행으로 이불로 감싼 조카는 잠든 채였다. 강을 건너 고갯마루 턱을 넘자 인솔자는 큰소리로 외쳤다.

“됐소다! 여기가 바로 남조선이외다!” 일행은 산 밑에 있는 민가에 들어가 모두 젖은 옷을 갈아입고 그 집 주인이 내주는 흰 쌀밥을 먹었다. 북쪽에서는 강냉이밥이나 수수밥만 먹던 사람들이 흰쌀밥에 두부찌개를 보자 천 년이나 굶주렸던 귀신들처럼 정신없이 먹어치우고 식곤증에 겨워 모두 방에 떨어져 잠을 잤다. 잠을 자고 나자 안내인은 일행을 문산으로 끌고 갔는데 그곳은 미군부대였다. 머리가 노랗고 눈동자가 파란 미군들이 일행에게 제일 처음 선물한 것은 사정없는 DDT분말이었다. 모두 하얀 밀가루 같은 그 DDT가루를 뒤집어쓰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2살짜리 조카만 “아아앙”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싱거미싱 돌리는 ‘선덕여왕’, 그 시대의 여성상

1948년 말 겨울 어머니가 성진에서 출발하는 경원선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두 아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내려오셨다. 참으로 오붓하게 형수가 끓여주는 동태찌개를 앞에 놓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재회에 감사하였고 북에서 내려오지 못한 아버지만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해 겨울 내내 어머니는 북쪽 하늘만을 바라보며 우시고 또 한숨을 쉬셨다.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그러세요? 아마 아버지도 무슨 방법을 찾아 내려오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자 뜻밖에도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였다. “아니야, 아니야. 네 아버지야 어디서든 잘 견뎌내는 함경도 남자니까 난 걱정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고것…, 일제 때 부모들을 다 잃고 고아로 우리 집에 찾아와 내 품에서 자란 고것, 고것이 눈에 어른거려 견딜 수가 없구나.”

큰아들인 두범씨는 “어머니, 그 아이는 평양에 있잖아요. 만경대학원은 혁명열사들의 자녀학교라고 해서 아이들을 끔찍이 다루는 좋은 곳이에요. 뭘 걱정하세요.” 어머니는 계속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까짓 혁명열사고 만경대학원이면 뭐하겠니. 이 겨울방학 때 할미를 찾아 성진에 오면 그 아이가 얼마나 실망하겠니. 저 동구 밖에서부터 ‘외할머니’하고 달려 올텐데…… 내가 없으면 어쩌겠니. 그 천하의 고아가!”

그 해 겨울이 끝나기 전, 형님과 은범이 자고 있을 때 어머니는 선덕여왕을 졸라 북에서 가지고 온 보퉁이를 허리에 차고 새벽에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고 말았다. 그게 영원한 이별이었다. 어머니가 평양으로 가 만경대학원에 있는 외손녀를 만났는지, 아니면 외손녀가 겨울방학을 맞아 성진에서 외할머니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2015년 현재, 선덕여왕인 형수 최백록 여사는 96세의 나이로 용인에 있는 양로원에 계신다. 성진에서부터 머리에 이고 온 그 싱거미싱으로 1·4후퇴 피난지인 김해비행장 미군부대 근처에서 군복 세탁과 수선을 하며 온 집안 식구를 먹여 살리고 은범 소년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학비를 대주었다. 수복 후에는 서울 동대문시장에 올라와 역시 그 역사적인 싱거미싱으로 옷 수선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고 은범 청년의 대학 등록금도 마련해주었다.

80세를 넘긴 은범 박사가 조카들과 함께 선덕여왕 최백록 여사를 찾아가 치매를 걱정하며 슬그머니 물어본다고 한다. “형수님, 제가 누굽니까?” 거동이 몹시 불편한 형수님은 인자한 눈초리로 시동생을 바라보며 또렷하게 대답한다고 한다. “은범이지 누구야. 우리 은범이지!”

 

김광휘 작가

최은범 박사는 1934년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둔전리에서 출생, 8·15해방 이듬해 1946년 성진시로 이주, 중학교 2학년 재학 시절인 1948년 11월 부모의 슬하를 떠나 형님을 따라 월남하여 서울 한성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법학과 및 동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편입, 다시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1986년 8월 동 대학원으로부터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학위논문 「국제인도법의 발전과 전시민간인 보호에 관한 연구」는 당시 독보적인 학술연구업적으로 평가되었을 뿐 아니라 국내에 있어서 국제인도법 연구의 개화기를 열어 놓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1959년 3월 대한적십자사 공보부에 입사, 1963년에는 국제적십자 창시자 장 앙리 뒤낭의 저서 <솔페리노의 회고>를 번역해 출간하였다. 국내 초유의 이 책은 적십자사의 모든 임·직원, 봉사대원 및 반기문 학생(현 UN사무총장), 청소년적십자(RCY) 단원들의 필독서로 폭넓게 이용되었으며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1천만 남북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역사적 남북적십자회담 제의를 계기로, 남북대화를 추진하던 관계당국에 발탁되어 남북회담사무국 총장 특별보좌관에 기용된 후 초기 남북적십자 예비회담(판문점)의 전 과정과 본회담(서울, 평양)의 전략팀(외무, 국방, 내무, 안보, 통관, 적십자, 북한 전문가들로 구성)의 멤버로서 30여 회의 회담준비와 여기에 직접 참여했다.

최은범 박사는 적십자사 봉직 36년(1959~1994)의 기간 중뿐만 아니라 정년퇴직 이후 오늘날 까지도 국내에서 명실상부한 국제인도법 분야의 일인자로서 평가 받고 열성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그의 학술연구의 업적은 이미 국내에서 대한국제법학회의 학술상, 국제인도법연구원의 공로메달 등으로 포상되었으며, 국외에서는 자매적십자사들과의 교류 및 협력의 업적을 인정받아 포르투갈 및 몽골 적십자사의 공로패, 베트남 적십자사의 인도장을 수여 받은 바 있다. 또한 그는 1985년 정부의 국민포장, 2010년 대한적십자사의 인도장을 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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