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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 밥솥 이야기 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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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79

밥솥 이야기

나는 한 번 얻은 물건을 웬만하면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 어려서 할머니 손에 크면서 배운 결과다. 할머니는 무엇이나 건사해두면 다 쓸 곳이 있다고 궤짝에 넣어두는 분이셨다. 남한에 와 생활한 지 꽤 되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 우리 집 베란다는 복잡하다. 며칠 전에도 오래된 밥솥 하나를 끄집어내 동네 친구에게 주었다. 갑자기 밥솥이 고장나 A/S센터에 맡겼는데 이틀 후에야 찾는다고 했다. 당장 밥을 해먹자면 대용품이 필요한데 마침 잘 됐다 싶어 주었다. 비록 압력밥솥은 아니지만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버리지 않기 잘했다.

북한에서 살 때 같으면 멀쩡한 전기밥솥을 버리기는커녕 남에게 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 밥솥은 남한에 와 ‘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수료할 때 받은 것이었다. 솔직히 북한에선 전기밥솥을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 나무를 패고 석탄을 피워서 밥을 지어 먹었다. 가끔 전기화로로 해먹을 때가 있었지만 전기는 국가 것을 도둑질해 쓰는 것이고 또 정전이 잦고 전압이 낮아 별로였다. 재수 없으면 밥이 끓는 도중에 정전이 되었다. 그러면 그걸 솥에 옮겨 넣고 끓여야 했는데 죽인지 밥인지 모를 음식을 먹었다. 석유화로도 가끔 썼는데 그게 제일 무난했다. 석유 값 때문에 자주 쓰지 못했지만 돈깨나 좀 있는 집은 석유화로를 많이 썼다. 암시장에 석유는 언제든 있었다.

남한에 와 처음 전기밥솥 써보니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살다가 남한에 와 처음 전기밥솥을 써보니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정전될 염려도 없고, 전압이 높아 가정용 변압기를 설치할 필요도 없고, 밥이 다 될 때까지 옆에 지켜서 있지 않아도 되었다. 남한의 가정주부들이 집안일이 힘들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밥도 자동으로 하지, 쌀 씻을 때 더운 물이 나오니 손 시릴 일도 없지, 빨래는 세탁기가 하지, 청소는 청소기 돌려서 하지, 아기 기저귀는 일회용이라 세탁할 일 없지, ‘너무 좋은 줄 모르고 불평이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동안 살다 보니 사람 욕심이 그렇지 않았다. 솥에 쌀만 대충 씻어 넣어도 되는데 그것마저 하기 싫어졌다. 쌀이 너무 깨끗해 쌀함박이 필요 없을 만큼 쉬운데도 그랬다. 라면이 끓여먹기 더 간편했고 그것도 귀찮으면 컵라면을 먹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압력밥솥이 욕심나 바꿨다. 밥맛이 더 좋고 조리메뉴가 다양해 훨씬 좋았다. 그것도 그리 오래 쓰지 못하고 더 좋은 것으로 다시 바꿨다. 그렇다고 쓰던 것을 버리진 않았다. 굳어진 습성 때문에 그것도 베란다구석에 처넣었다. 하여간 우리 집 베란다에 뭐가 많다. 드럼세탁기를 새로 사면서 구석에 밀어놓은 통돌이세탁기도 있고, 전에 쓰던 정수기, 선풍기, 열풍기,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등 많다. 가지고 있다가 누가 달라면 쥐어주곤 하는데 그냥 버리긴 아깝다. 하늘나라에서 할머니가 내려다보며 역시 내 손자답다고 하실지 모르겠다.

북한에선 ‘솥’이란 말보다 ‘가마’란 말을 더 많이 썼다. ‘밥가마’, ‘국가마’ 등으로 불렀다.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고향에선 쇠로 된 큼직한 가마를 ‘솥’이라고 불렀다. 솥이 고유한 우리말이라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주로 노인들이 쓰는 말이라서 왠지 촌스럽게 느껴졌다. 남한에 와보니 ‘가마’란 말을 쓰지 않고 ‘솥’이란 말을 쓰고 있었다. 시골에선 장작불을 피워 끓이는 쇠솥을 ‘가마솥’이라고 했다. 왜 같은 말인 ‘가마’와 ‘솥’을 붙여서 부르는지 모르겠다. 하긴 ‘가마’란 말이 또 있었다. ‘쌀 한 가마, 쌀 두 가마’라는 말을 들었는데, 북한에선 ‘쌀 한 가마니, 쌀 두 가마니’라고 부른다. 아마 북한에 가서 “쌀 한 가마 채워라.”라고 시키면 진짜로 솥에 생쌀을 가득 채워 넣을지 모르겠다. 북한에선 전기밥솥도 ‘전기밥가마’라고 한다. 매장에도 ‘전기밥가마 몇원’이라고 써 붙인다.

쿠쿠는 전시용?

최근 남한에서 흘러들어가는 압력밥솥이 북한에서 수요가 높다. 그 중에도 ‘쿠쿠’라는 브랜드의 압력밥솥이 제일 인기라고 한다. 특히 솥에서 나오는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등의 안내멘트가 구매욕을 자극하는데 흔히 ‘말하는 밥가마’로 통한다. 하지만 전기밥솥이 있어도 전력부족으로 과시용에 그치고 만다. 그마저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쇠솥과 알루미늄솥이 일반적이다. 가난한 집들은 알루미늄솥도 귀하다. 알루미늄이 중국에 넘기는 밀수품이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은 알루미늄솥을 팔고 쇠솥을 쓰고 있다. 그만큼 알루미늄솥은 도둑 맞기도 쉽다. 나도 북한에 있을 때 알루미늄솥을 도둑 맞은 적이 있다. 굶주린 군인이 우리 집 부엌에서 알루미늄솥을 밥이 담긴 채로 들고 달아나다가 잡혔다. 괘씸했지만 불쌍하기도 해서 밥은 몽땅 비닐봉지에 담아 주고 솥만 찾아왔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물건을 선뜻 못 버리는 이 습관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수 있겠다.

도명학 / 자유통일문화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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