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6년 3월 1일

박계리의 스케치北 | 변월룡,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말하다 201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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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리의 스케치北 51

변월룡,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말하다

 

변월룡의 <‘해방’을 그리기 위한 습작 : 달리는 여인>(1958), <분노하는 인민>(1961)은 심리극을 보는 것 같다.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관계가 감정으로 전달되는 작품이다. 화가의 붓질과 선택한 색채 및 광선으로 이렇게 많은 감정을 담아낼 수 있다니…. 그의 작품 앞에 서면 한참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변월룡은 1916년 러시아 연해주 쉬코톱스키 구역의 유랑촌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려인 자녀들만 다니던 학교인 블라디보스토크 8호 모범 10년제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키워나갔다. 이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레핀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동 대학교 데생과 부교수가 된다.

변월룡은 성장하면서 연해주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비롯해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고려인들에 대한 불평등 제약들을 지켜보면서 온 몸으로 이를 받아 안으며 성장했다. 물론 그는 이러한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당당히 섰다. 그러한 그에게 한반도라는 땅은 무엇이었을까. 부모들이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식민지 땅과 해방, 분단, 전쟁으로 한 치 앞을 모르게 꿈틀거리고 있는 한반도를 변월룡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부의 지시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는 레핀대학교의 부교수로서 소련 문화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 최고의 미술대학인 평양미술대학의 학장 겸 고문으로 1953년 6월부터 1954년 9월까지 북한에서 활동하게 된다. 평양미술대학의 교수들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지도를 받고자 노력했고, 이는 북한 땅을 떠나온 후에도 편지를 통해 지속되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 미술계가 도달하고자 하였던 길은 당시 소련에서 보여주고 있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소련 군정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이와 관련된 소련 학자들의 글이 소개되었고, 작품들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론으로 아는 것과 이를 구체적인 창작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달랐다. 또 다른 습득의 과정이 필요했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레닌그라드 레핀대학교의 교수인 변월룡의 등장은 북한 미술계에서도 매우 반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 1961, 49x64.5, 에칭

<분노하는 인민>, 1961, 49×64.5, 에칭

(부분), 1958

<‘해방’을 그리기 위한 습작>(부분), 1958

육체가 지닌 생명의 힘을 재현하다

북한의 미술가들은 변월룡의 작품을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에서 이른바 ‘전형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는 개개인의 성격과 운명에 반영되어 있는 시대정신을 포착하는 예술적 재능을 지녔다. 보통 사람들의 생활과 매일의 관심사 및 희노애락을 바라보는 그의 타고난 감성은 사람의 얼굴에 품고 있는 도덕적이며 철학적인 의미를 포착해낼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인물화가 힘이 넘치는 조형적 특징과 함께 인간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힘을 재현함으로써 감상자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 또한 큰 매력이다.

변월룡의 걸작들, 특히 혁명을 주제로 담고 있는 작품들의 주인공들을 보면 이들이 처했던 주변 환경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정신세계도 고려하고 있다. 그는 시대의 윤리적 이상을 심리적인 관점에서 탐구하는 일을 자신의 주요 임무로 삼았던 것 같다. 이는 인간 정신의 이상적 가치에 대한 깊은 믿음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이처럼 변월룡은 자신의 작품을 일종의 도덕적 강령으로 만들려는 목표를 추구하였고, 현실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미래를 제시하고자 하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소련에서 배우자까지 데려와 간병을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변월룡은 소련으로 돌아간다. 1954년 9월이다. 변월룡은 몸을 회복하고 곧 다시 돌아오겠다며 길을 떠났지만 이후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북한 땅을 밟진 못했다. 이는 ‘8월 종파사건’이라고 불리는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을 통해 소련파와 연안파가 숙청되는 일련의 상황들과 관련있다고 판단된다. 이후 북한 미술계의 유화 스타일도 변월룡의 작품과는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우리식 유화’가 주창되기 시작하면서 변월룡적인 작품들은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그가 2016년 서울에 나타났다. 덕수궁미술관에서 지금 그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쉽게 변월룡의 시대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폭풍의 역사 속을 살다간 그 시대의 예술가들인 최승희, 이기영, 김용준, 배운성 등이 그의 초상화를 통해 우리를 만나러 왔다. 이들과 어떤 대화를 하게 될까?

박계리 /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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