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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 더울 새가 없다 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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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83

더울 새가 없다

 

북에 있을 때 겨울은 겨울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싫었다. 겨울이면 여름이 빨리 왔으면 했지만 정작 여름이 되면 더위에 지쳐 겨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그나마 내가 살던 고장은 백두산이 가깝고 해발 750m의 고지대다. 모르는 사람은 고지대의 여름이 무턱대고 서늘한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중국 대륙과 인접해 있어 대륙성 기후의 특징이 뚜렷한데 낮이면 볕이 너무 뜨거워 머리가 빠질 지경이다. 대신 습도는 낮아 그늘이 서늘하고 일교차가 커서 밤에는 괜찮다. 열대야 현상은 드물다. 열대야가 있어도 2~3일 정도에 그치고 아예 없는 해가 더 많다.

내가 살던 고장에서 훨씬 남쪽인 황해도, 강원도, 평안남도 지역은 남한과 별 차이 없이 덥다. 비를 맞아도 미지근하고 바다가 가까워 습도가 높아 몸이 끈적거린다. 대동강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평양은 수돗물이 시원하지 못하다. 냉각수가 나오는 정수기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걸 갖추고 사는 집이 얼마나 될까 싶다. 그것도 전기가 있어야지, 평양의 전기 사정이 좀 낫다곤 하지만 그 정도론 가전제품을 제대로 쓰기 어렵다.

중국산 선풍기, 잦은 정전으로 그냥 세워둔 날 더 많아

북한에 있을 땐 여름을 인내심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길에서도 땀을 뻘뻘 흘렸다. 열차와 버스도 냉방이 되지 않는다. 부채질이 유일하다. 중국산 선풍기를 구입한 적이 있지만 정전이 잦아 그냥 세워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다 어느 날 빚쟁이가 뺏어갔는데 그까짓 것 무용지물이나 같아서 별로 아쉬운 감도 없었다.

어느 해 여름 황해남도 해주에서 장산반도까지 수백리길을 도보로 간적이 있다. 양옆에 넓은 벌을 낀 지방도로를 걸었는데 잠시 쉬어갈 그늘 하나 없었다. 그 먼 길에 가로수도 없었다. 뙤약볕에 타면서 걷다가 농가를 만나면 무작정 들어가 냉수를 청해 마시곤 그 집 토방에 넉살 좋게 넙죽 앉아 쉬어갔다.

그때 장산곶에서 백령도를 바라보며 황해도보다 더 남쪽인 서울이나 부산은 더 죽을 정도로 더울 텐데 사람이 어찌 살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곳에 산다면 며칠 못 넘기고 질식해 죽을 것 같았다. 통일되면 따뜻한 남쪽에 이사 가고 싶다던 소망이 싹 사그라졌다.

하지만 정작 남한에 와보니 딴판이었다. 남한에서 지낸 여름은 백두산 지역에서 살던 때보다 더 시원했다. 더위에 노출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다르겠지만 도시는 어디나 시원했다. 집과 사무실에도 에어컨이 있고 버스를 타도 지하철을 타도 냉풍이 시원하다. 승용차에도 에어컨이 있고 심지어 에어컨 장치가 있는 고급 오토바이도 봤다.

선풍기는 소모품으로 인식될 만큼 흔했다. 언젠가 길가에서 신문 구독자를 찾는 어느 신문 영업사원과 마주쳤다. 신문 구독을 신청하면 현금 5만원과 선풍기를 사은품으로 준다기에 신청했더니 다음날로 선풍기가 집에 도착했다. 그땐 굉장한 횡재를 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보니 남한에서 선풍기쯤은 재산으로 쳐주지도 않았다. 북한에선 어쩌다 구입한 선풍기마저 빚쟁이한테 뺏겼는데 너무도 딴 세상이었다.

에어컨은 남한생활 5년이 지나서야 구입했다. 남한 생활 기간이 늘면서 체질이 달라졌는지 선풍기만으론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는데 특히 열대야가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큰마음 먹고 에어컨을 사놓고 보니 좋긴 좋았다.

하지만 전기 사용량이 그렇게 많을 줄은 생각 못했다. 주구장창 에어컨을 켜놨더니 전기요금 폭탄을 맞았다. 화들짝 놀라 다시 버티기에 들어갔고 너무 견디기 어려울 정도가 아니면 켜지 않았다. 그런대로 열대야가 올 때만 아니면 선풍기만으로도 지낼 만 했다.

주구장창 에어컨 켰더니 전기요금 폭탄 화들짝

사실 남한 토박이들에 비하면 탈북민들이 열악한 환경을 감내하는 의지가 더 강한 것 같다. 한때 어느 탈북자 단체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사무실에 에어컨 없이 4년 가량 지냈다. 직원들 모두가 북한에서 직장 생활할 때를 생각하면 견딜 수 있다며 땀을 씻어가며 일했다. 단체 운영비를 조금이라도 절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참 편한 세상이다. 집을 나서면 지하철역이 5분 거리고 버스정류장은 바로 옆이다. 전동차도 버스도 오르기만 하면 에어컨 바람이 시원히 마중한다. 어느 목적지에 도착해도 10분 이내에 냉방이 된 건물에 들어갈 수 있다.

정수기도 가는 곳마다 놓여 있어 고향에서 마시던 물 못지않게 차가운 물을 정수기에서 뽑아 마신다. 그럴 때면 이가 시리고 뒷머리가 쩡하던 고향의 안개물을 마시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도명학 / 자유통일문화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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