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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인물 | 이한응, 이장원 20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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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인물

이한응, 풍전등화 위기 속 구국외교 펼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영국에서 구국외교를 펼친 이한응(李漢應, 1874~1905) 열사를 2016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74년 경기도 용인에서 군수인 이경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헐버트가 세운 육영공원에서 근대학문을 익혔다. 1894년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성균관 진사에 합격한 후 한성부 주사에 임명되었으며, 1899년 관립 영어학교 교관으로 후학을 지도하였다. 1901년 3월 민영돈이 주영공사로 임명될 때 선생도 주영공사관 참서관으로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선생은 영국의 상류층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면서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은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한반도의 평화가 유럽의 세력균형과 연관된다는 매우 독특하고 창의적인 견해를 제시하며, 영국 외무부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선생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전후에 한국의 독립이 유지되기 더욱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1905년 3월 영국 외무대신에게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등 끈질긴 외교 활동을 펼쳤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4년간 런던에서도 맹렬히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서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1905년 5월 12일 자결 순국하였다. 1962년 정부는 숭고한 선생의 뜻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목숨으로 해상봉쇄 거점 사수한 이장원 중위

국가보훈처는 이장원 중위를 11월의 6·25전쟁 호국영웅으로 선정하였다. 이장원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해병사관후보생 5기로 입대하여 그해 9월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후방교란과 해안봉쇄 작전을 수행하는 해군 엄호의 임무를 띠고 해병 독립 42중대 소속 황토도(黃土島) 파견소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황토도는 함경남도 영흥만 주변 아군의 해상봉쇄선상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북한은 이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습공격을 시도한다. 1951년 11월 29일 앞선 두 차례의 기습공격이 이장원 부대에 의해 연달아 실패하자 북한군은 1개 대대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 황토도를 향한 최후의 일격을 가해 왔다. 얼마 후 치열한 교전 중 무전기마저 파괴되어 아군의 지원조차 기대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르렀으나 이장원과 그의 소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북한군의 집중포격으로 이장원과 그의 부하 3명은 결국 전사하게 되었지만, 소대장의 최후를 눈앞에서 맞이한 그의 소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진지를 사수하였다. 이로써 3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황토도 공격은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해상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현재 이장원 중위는 증조부 이남규 선생과 조부 이충구, 부친 이승복과 함께 현충원에 안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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