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고향을 가다 | 국가의 부름 받고 나선 덕장(德將), 애국의 제2막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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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고향을 가다 | 김영철 이북5도위원장(평안북도지사)

국가의 부름 받고 나선 덕장(德將), 애국의 제2막 열다

 

김영철 이북5도위원장(평안북도지사)

김영철 이북5도위원장(평안북도지사)

서울 종로구 비봉길에 위치한 이북5도청은 활기에 차있다. 지난 9월부로 함경북도, 평안북도, 평안남도, 3개 도의 도지사가 새로 바뀌었고 새로 부임한 신임 지사들이 의욕적이며 활기에 차있기 때문이다. 2016년 올해의 마지막 호에서는 신임 평안북도 김영철 지사를 만나보도록 하자.

김영철 지사는 평안북도 선천군 남면 삼봉리 57번지에서 태어났다. 북한 지도를 놓고 보면 평양시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신의주행 철길을 따라 평안남도를 거치고 평안북도 운천, 정주, 곽산을 지나 신의주를 향해 달리다 보면 해안가 분지를 차지하고 있는 선천에 다다르게 된다.

한국의 예루살렘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평북 선천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린다. 개화기 때에 산 좋고 물 좋은 이곳에 선교사 휘트모어(N.C. Whittemore)와 의사 샤록스(A.M. Sharocks)가 자리를 잡고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 덕에 평안북도 선천 땅은 구한말 한반도에서 가장 개명한 시골 마을이 되었다. 옛 통계에 의하면 당시 선천의 인구는 2만 명, 농가 수는 4천 호 정도였다고 하는데, 마을에 10곳이 넘는 교회가 있었고, 군민의 60% 이상이 교인이어서 일요일에는 장이 설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선천읍에 세워졌던 신성중학교와 보성여학교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정주의 오산학교와 함께 민족학교로 유명하였다. 읍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동래강가에서는 신학문을 배우는 청소년들이 댕기를 달랑거리며 책을 읽거나 짧은 치마와 검정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누비면서 신식창가와 찬송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한 마디로 말해 진보적인 거리, 젊은이들의 마을이었던 셈이다.

얼마 후에는 조지 맥쿤(George S. McCune, 윤산온)이라는 활달한 선교사가 다시 선천에 찾아와 청소년들을 분발시켰고 멀리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개화기 때 시골 군 단위에서 미국 유학을 간 사람 수로 치자면 평안북도 선천군이 단연 선두를 기록할 것이다. 연세대 초대 총장을 지냈고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던 백낙준 박사도 신성중학교 출신으로 선천 땅에서 공부를 하였고 선교사 맥쿤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바로 이런 고장에서 1947년, 그러니까 6·25전쟁이 발발하기 3년 전에 남자아이 김영철이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원희 옹은 지주였으며 해방 후에는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해가는 가운데에서도 고당 조만식 선생과 함께 민족주의와 기독교 정신을 앞세우는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함께 정당 활동을 하였다. 갈 데 없는 반동이었다. 그래서 큰아버지 김웅균과 아버지 김태균은 일찌감치 38선을 넘어 남하하였다. 남쪽으로 내려온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1949년 1월에 북에 두고 온 식구들을 위해 배 하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엑소더스호는 비밀리에 해주로 떠났다.

그날 할머니와 고모는 썰물을 이용해서 선천 앞바다에 두둥실 떠있는 신미도(身彌島)에 일이 있어 떠난 상태였다. 썰물 때는 바닷물이 쭉 빠져 육지로 변하는 갯벌을 저벅저벅 밟고 할머니와 고모가 신미도에 닿을 때쯤 해주에서 올라온 안내인이 할아버지에게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였다. “지금 떠나셔야 합니다. 입으신 채로 그냥 가십시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배를 탈 수 없습니다.”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할아버지와 삼촌들은 미숫가루를 짊어지고 어머니는 어린 영철을 들쳐 업고 해주로 향하였다. 물론 선천 앞바다 신미도로 일보러 떠났던 할머니와 고모는 북한땅을 떠나지 못하였다. 해주에서 떠난 그 배는 김포군 월곶포구로 들어왔고 김영철 아기와 일가는 김포에서 잠시 머물다가 경기도 양평 지역으로 이주하여 용문에 자리를 잡았다.

1949년 1월 온 산천이 꽁꽁 얼어붙던 그 엄동설한에 머나먼 선천 땅에서 남쪽을 향해 엑소더스를 감행하였던 김 씨 일가의 일대기는 파란만장하다. 큰아버지 웅균 씨는 경찰복을 입고 38선을 지키는 청단파출소의 초소장을 맡았다. 그래서 6·25전쟁이 날 때까지 북에서 넘어오는 탈북민들을 필사적으로 엄호하고 보호하였다. 아버지 태균 씨는 정일권 부대에 들어가 참모로 활약하다가 후에는 경찰로 옮기고 지리산 토벌대의 간부로서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그 분은 지금 93세가 되어 6남매나 되는 효자, 효녀들 그리고 수많은 손자, 손녀의 재롱을 보면서 노후의 햇살을 즐기고 계신다.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전국의 수많은 오지와 산골을 헤매던 김영철 소년은 성장기에 다행히도 경기도 용문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인문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나왔고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겨우 한 학기를 다닌 후 스스로 학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뒤로 고만고만한 여동생이 둘, 그리고 넷이나 되는 남동생이 딸려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서울에 유학을 할 수도 없었고 사립대학의 학비를 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씨 고운 김영철 소년은 여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업어서 키웠다. 김영철 소년의 등은 마를 새가 없었다. 거의 연년생으로 태어났던 동생들이 포근한 맏형의 등이 너무나 편안했기 때문에 스르르 잠이 들면서 마음 놓고 소변을 봤기 때문이다. 여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도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김영철 소년은 공짜로 공부하고 앞날을 개척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거리에 커다란 모집광고가 걸려있었다.

‘육군3사관학교 창설 제1기생 모집, 전원 장학교육, 졸업과 동시에 장교 임관.’ 친한 친구와 함께 주저하지 않고 응시한 후 합격하였다. 프랑스와 독일 편제를 따른 단기사관양성소였다. 경북 영천 소재 부관학교 자리에서 개교를 하였는데 가입교 기간에는 논산훈련소에서 가입교 코스를 밟았다. 대한민국 창군 이래 최초로 개교하는 단기사관학교의 첫 입학생들이라고 논산훈련소의 악명 높은 조교들이 어찌나 무서운 얼차려를 시키는지 입교생 모두가 얼이 빠졌고 적응하지 못하는 상당수가 눈물을 흘리며 퇴교를 자청하기도 하였다.

화를 내기보다 온화한 미소로 과오를 덮어줄 것

김영철 생도는 가입교 기간을 잘 참아냈고 경북 영천에 있는 3사관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해서 성실하게 공부하고 훈련을 받았다. 늘 우수한 성적을 놓치지 않았는데 너무나 심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든지 마지막 종합훈련을 앞두고 급성폐렴에 걸렸다. 병상에 누워 겨우 기본점수를 받는 바람에 최상위 성적에 근접했던 영철 후보생은 감점을 받아 기존의 예상된 성적을 놓쳤다. 그 바람에 임관한 771명 중 25위를 하였다. 그래서 군번이 25번이다. 1970년 1월 17일 임관식 때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어깨를 쳐주시며 다소 구태의연한 격려를 해주셨다.

“최선을 다했으니 됐다. 다만 군 생활을 하면서도 이것만은 잊지 말아라. 효는 백행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김영철 소위는 아버지, 어머니를 향해 멋진 거수경례를 부치며 외쳤다. “충성! 효성!”

그는 길고 긴 군 생활을 성실과 인내로 잘 해냈다.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인들 경쟁이 없겠는가만 군 생활이야말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조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4년제 육군사관학교 졸업생들이 있고, 4년제 정규대학 출신 ROTC도 있고, 계급정년제도 있고, 데리고 있는 부하들 중 한 명이라도 사고를 내면 곧바로 문제가 되는 조직이 바로 군대이다. 그런 조직 속에서 제때에 진급을 하고 좋은 보직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치열하고 혹독한 과정을 거쳤다는 뜻이다.

어쨌든 그는 3사관학교 졸업생들 중에서 비교적 선두그룹에 있었고 상관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부하들로부터는 별명도 얻었다.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덕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거느리는 참모나 지휘관들이 언제나 두 계급 이상씩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대장이 되면 소령급의 참모들이 생기고 서너 계급 낮은 대위급이 중대장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부하나 참모들이 무슨 잘못이나 과오를 저질렀을 때는 꼭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래, 그대들은 나보다 두 계급 이상 낮은 소령이나 네 계급 낮은 대위급이다. 그 낮은 계급만큼 생기는 격차를 나는 교육시키는 자세로 채워갈 것이다. 화를 내기보다는 온화한 미소와 상냥한 말투로 채워줄 것이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참모나 지휘관을 단골음식점으로 불러내서 꼭 저녁과 술을 사주며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웠다.

1989년에 대령이 되었고 1990년에 서울 여의도에서 마지막 국군의 날 행사를 하였다. 그는 행사에서 육·해·공군에서 선발되어 온 수많은 장병들의 보급과 장비를 관리하는 군수처장직을 맡았다. 그 행사를 총 지휘하는 제병지휘관은 육사16기 출신의 정인균 중장이었다. 행사가 성황리에 마무리 되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국방장관과 제병지휘관을 치하하였다. 이에 제병지휘관이 군수처장인 김영철 대령을 불러 대통령의 치하말씀을 전하였고 ‘수고 많았으니 가족과 같이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당시 금일봉을 하사받고 내외가 아버지 김 옹을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군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다.

그 후로 그는 9사단 28연대장으로 보직되었다. 1군단에서는 육사를 나오지 않은 3사 출신으로서 단 한 명의 예외 연대장이라는 명예와 중책을 맡았다. 그 후 야전과 정책부서 경력을 두루 역임했던 김 대령은 1997년 1월 1일자로 꿈에 그리던 별을 달았다. 장군이 된 것이다. 50사단 작전부사단장을 거쳐 9군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 후 1군사령부 참모와 육본처장 등 전방과 후방을 오가며 정신없는 군 생활을 하면서도 못다 한 학업을 마치기 위해 밤잠을 줄였다. 방송통신대학이 생겼을 때 5년제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5년 만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후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에 들어가 외교국방과 안전관리를 전공하였으며, 5학기 만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이었다. 한 번도 지각하거나 리포트를 늦게 낸 일이 없었다. 대전 지역에서 근무할 때 목원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학위논문은 ‘외국인 직접투자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한 손에는 별, 다른 한 손에는 박사학위

박사학위를 받을 때 쯤 그의 군 생활도 끝을 맺게 되었다. 원주의 ‘제1군수지원사령관’을 끝으로 군 생활을 끝내야 했던 것이다. 한 손에는 별, 한 손에는 박사학위였다. 여한은 없었지만, 별 둘을 달고 사단장을 나갔으면 오죽 좋았을까.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거기까지만 축복을 내린 듯하였다. 그는 순명하고 조용히 집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고자 하였다. 그런 그에게 하늘은 다시 제2의 삶을 마련해주었다. 학위를 받은 목원대학교에서 그를 객원교수로 초빙한 것이다. 국제통상론과 FTA 통상론 등 경제학 전공과목과 교양과목(북한학, 전쟁론)을 강의해 달라는 청이었다. 쉬지도 못하고 달려가 강단에 서서 젊은 영재들을 마음껏 가르쳤다. 그 대학의 ROTC생들에게는 북한학과 군사전략, 그리고 전쟁사를 함께 가르쳤다. 보람 있는 노후였다.

만 10년을 가르치고 2012년에 집으로 돌아오자 군 부대가 많은 양평군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양평군 군사정책자문관으로 맞아주었다. 힘을 다해 조언하고 기획안을 짜주었다. 그러면서 이북5도청을 틈나는 대로 찾고 평북성우회 일을 성실히 맡아 했다. 육사 2기의 손희선 장군, 평북지사를 6년간이나 역임하였고 전쟁기념관을 창설하여 사무총장을 맡았던 장정렬 장군의 지도를 받았다. 고향 선배들의 곡진한 사랑과 편달이 넘쳤다. 평북도민회의 보이지 않는 성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9월 28일 부로 차관급에 해당하는 이북5도위원장 겸 평안북도지사로 발령 받았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겸손히 나온 것이다. 1949년, 6·25가 나기 한 해 전에 왜 하늘은 이 땅에 없을 뻔했던 김영철을 어머니 등에 업혀 아득한 북한 선천의 언 땅을 달리게 하고 해주 앞바다의 얼어붙은 바다를 헤치게 하여 남쪽으로 보냈을까? 그 해답은 67년만인 2016년 9월에 풀렸다. 하늘의 대답은 이런 것이다. ‘나는 김영철을 평안북도지사로 쓰기 위해 67년 전에 살아남게 하여 남쪽으로 내려 보냈노라.’

 작가 / 김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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