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7년 6월 1일 0

이달의 인물 | 장덕준, 최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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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인물 | 장덕준, 최용남

목숨 건 취재 장덕준, 동포의 참극 알렸다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추송 장덕준(秋松 張德俊, 1892~1920) 선생을 2017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장덕준은 1892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기독교소학교와 명신중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졸업 후에는 모교의 교사로 임명되어 2년간 봉직했다.

1914년에는 일본인이 발행하는 <평양일일신문사>에서 언론인으로 첫발을 내딛었으나 1년 후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장덕준은 일본에서 김성수와 함께 육영회 설립을 추진했지만 무산되었고, 곧바로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기자로 재직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일제에 의해 정간되었을 당시 만주 훈춘에서 조선인 무차별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주민 5천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장덕준은 이 소식을 듣고 현지로 달려갔다. 취재를 한다 해도 정간 중인 <동아일보>에 보도할 지면도 없었으며, 자신은 폐병에 걸려 혈담까지 토하는 건강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열성은 그를 죽음의 땅으로 뛰어들게 했고, 간도 일대에서 벌어지는 일본군의 참혹한 만행을 취재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피살되어 한국 최초의 순직기자가 되었다.

한국기자협회는 장덕준의 투철한 기자정신을 기려 1971년에 제정한 기자협회 기장의 뒷면에 그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장덕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민의 힘으로 무장한 백두산함장 최용남

국가보훈처는 최용남 해군 중령을 6월의 한국전쟁 호국영웅으로 선정하였다. 최용남은 1950년 4월, 제2함대 PC-701 함장으로 부임했다. 선명이 ‘백두산’인 PC-701함은 당시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함으로서, 우리나라에 강력한 전투함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해군 전 장병과 국민이 각출한 성금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최용남 함장은 한국전쟁 발발 당일 동해로 긴급히 출동하던 중 부산 동북방 해상에서 무장병력 600여 명이 탑승하고 남하하는 1천 t급 북한 무장수송선을 발견했다. 칠흑 같은 어둠과 악천후 속에서 5시간에 걸친 추격·교전이 시작되었고 최용남의 탁월한 함정 전투지휘 앞에 적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격침되었다.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던 이 대한해협해전의 승리는 전쟁 초기 게릴라에 의한 후방 교란을 미연에 방지하였고, 유엔군은 179만 명의 병력을 비롯한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부산항으로 무사히 수송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최용남이 이끄는 백두산함은 서해안 방어 및 봉쇄작전을 실시하여 전쟁 직후 북한군의 끈질긴 해상침투를 저지하였고, 인천상륙작전 시에 적을 유인하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는 최용남 함장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1951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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