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7년 11월 1일

박계리의 스케치 北 | 같은 뿌리, 다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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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리의 스케치 北 71

같은 뿌리, 다른 노래

박계리 / 미술사학자

임민욱,  2017, 7개의 사운드 플랫폼, 노래 아카이브 제작실, 진행형 퍼포먼스 프로젝트 녹, 음시스템, 마이크, 헤드셋, 아이패드, HD모니터, 석고, 인조 소나무

임민욱, <소나무야 소나무야> 2017, 7개의 사운드 플랫폼, 노래 아카이브 제작실, 진행형 퍼포먼스 프로젝트 녹, 음시스템, 마이크, 헤드셋, 아이패드, HD모니터, 석고, 인조 소나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역사를 몸으로 쓴다’ 전시가 열렸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배명지는 본 전시가 예술 매체로서의 신체와 몸짓이 우리를 둘러싼 사회, 역사, 문화적 맥락에 어떻게 관심을 드러내 왔는지에 초점을 두고 탄생했다고 밝혔다.

국내외 총 38명(팀)의 작가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몸짓이 우리의 삶의 이야기에 접근하는 방식과 예술 태도에 따라 총 3개의 파트로 구성되어있다. 1부에서는 ‘집단 기억과 문화적 유산’을 몸짓으로 재구성한 퍼포먼스 작업을 조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특수한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예술가들이 어떻게 몸짓으로 반응하고 저항하였는지를 전시하고 있었다.

2부 ‘일상의 몸짓, 사회적 안무’는 평범한 일상의 몸짓을 예술의 문맥으로 끌어오면서, 현실과 삶의 문제를 역설하였던 1960년대 이후 퍼포먼스 작업들을 ‘사회적 안무’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 3부 ‘공동체를 퍼포밍하다’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전 지구화의 위기 속에서 우리 공동체가 안고 있는 사회적 이슈들을 몸으로 재상연한 작품들과 함께 공동체 일원과의 협업에 기반을 두고 일시적 공동체를 실험한 집단 퍼포먼스 작업들을 소개하고 있다.

몸에 새겨진 사회적 기호 따라 소리의 맥락은 달라진다

38팀의 작품 중 분단 문제와 관련하여 내게 가장 다가왔던 작품은 임민욱의 <소나무야 소나무야>(2017년)였다. 이 작품은 ‘탄넨바움(Tannenbaum)’이 시대와 국가를 경유하며 변화한 노래의 맥락을 추적한 아카이브 형식의 사운드 설치 작품이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쓸쓸한 가을날이나 눈보라 치는 날에도,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잎”으로 끝나는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에 대한 작품이다.

‘소나무야 소나무야’는 독일 민요이자 크리스마스 캐럴인 ‘탄넨바움’이 수입되어 번안된 노래다. 독일의 ‘탄넨바움’은 영국으로도 흘러갔는데, 영국에서는 ‘레드 플래그(The Red Flag)’라는 노동가로 변형되어 많은 노동자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도 상륙해 ‘아카하타노 우타(赤旗の歌)’라는 민중가요로 번안되었다.

탄넨바움은 1910년대 국내에도 유입되어 애국가로 불렸으나, ‘아카하타노 우타’를 들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를 직역하여 ‘적기가(赤旗歌)’로 불렸다. ‘적기가’는 이후 북한으로 유입되어 광복 이후에 불린 북한의 대표적인 혁명가요가 되었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레드 플래그’, ‘아카하타노 우타’, ‘적기가’ 모두 ‘탄넨바움’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해서 부르는 과정에서 탄생한 노래들이다. 임민욱은 이 노래를 누가 부르냐에 따라 혹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애국가로, 노동가요로, 항일투쟁가로 때로는 혁명가요로 불리게 된 상황에 주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소나무야 소나무야’ 노래가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고, ‘적기가’는 금지곡이다. 누구의 몸이 어떤 시대에 어떠한 이데올로기와 접촉하는지에 따라 몸에 새겨진 기억 정보, 사회적 기호가 다르고, 이에 따라 그가 만든 소리의 맥락과 내용은 확연히 달라진다.

임민욱은 이 노래들의 이러한 차별점뿐만 아니라, ‘탄넨바움’이 시대와 장소를 바꿔가며 흘러가면서도 지속적으로 공동체를 드러내는 노래로, 공동체를 대변하는 소리로서 그 사회에서 사랑을 받았다는 보편적인 순환과정에도 주목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객이 실제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플랫폼이 설치되어 있다. 녹음실에 들어가면 각각의 노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을 할 수 있다. 노래의 가사와 분위기는 각각 다르지만, 하나의 노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노래는 서로 잘 조응되어 합창의 소리로 퍼져 나올까? 이데올로기도 다르고 장소성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정서를 담고 있지만, 이들 간의 합창이 불협화음의 화음이라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각 지역의 사람들은 이 ‘탄넨바움’ 노래를 듣고 그 곡조에 맞춰 자연스럽게 몸이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고, 가슴이 뭉클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곡을 번안하고자 했을 것이고, 번안 후에도 뜨거운 사랑을 주었다. 그러나 몸이 받은 감동은 번안 과정에 이성이 개입되며 이데올로기가 투영되었고, ‘탄넨바움’은 적대적인 두 노래, ‘애국가’ 혹은 ‘적기가’가 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판단하는 ‘적대적’이라는 반응도 조금 더 면밀하게 뜯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몸이 반응하는 동시대성의 공감은 어느 지점에서 꿈틀하는 것일까?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부를 수 없는 노래가 하나 있었다. 검은 천이 드리워져 있는 그 무대, 현재도 진행 중인 한국 분단의 역사적 산물이 그곳에도 있었다. 관객이 부른 노래는 전시 동안 녹음되어 한 곡의 긴 노래로 재편성된다. 어떤 노래는 많이 불리고 어떤 노래는 전혀 불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불리지 않는 노래는 ‘흩어진 기억’ 혹은 ‘사회적 망각’을 현재화한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스튜디오로 들어가 마이크를 잡고 ‘소나무야 소나무야’를 불렀더니, 작가의 “녹음되셨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내 노래가 다른 사람들이 부른 다른 버전의 노래들과 섞여서 어떠한 하모니를 만들어낼까? 여전히 ‘탄넨바움’ 곡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곡이 탄생할까? 불협화음의 화음은 다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을 어떻게 흔들어 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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