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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스토리 | 돼지고기를 보면 어머니가 그립다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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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스토리 81

돼지고기를 보면 어머니가 그립다

이지명 / 국제펜(PEN)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산지 벌써 13년이다. 지나간 시간은 참으로 가슴 뿌듯하다. 크게 한 일도 없고 내세울 일은 더더욱 없지만 상상으로만 그려보던 남쪽 나라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낸 소중한 기간이었다.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오늘은 내가 북한에서 보냈던 추석과 관련한 추억의 한 토막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간 북한 현실을 소개하는 글을 쓰며 나는 북한 사람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고 그들의 애환 속에 늘 자신을 묻고 살았다. 비록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가지만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꿈에서도 그리워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소중한 땅이다. 언제면 그 땅에도 서광이 비칠지, 아직도 가난을 털지 못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산해진미를 마주하고서도 즐거움 대신 눈물이 먼저 글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더욱이 추석이 오면 소박한 제사상이나마 차려놓고 어머니가 그리워 울먹이고는 한다. 이번 추석에도 그랬다.

돼지고기를 무척 즐기셨던 어머니

1915년생이었던 어머니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5년에 돌아가셨다. 팔순이면 북한에서는 살 만큼 살았다고 하지만 내겐 늘 가슴에 걸리는 것이 있다. 어머니는 음식 중에서도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를 무척 즐기셨다. 그러나 북한에서 돼지고기는 주요 명절에 국가 공급을 받아야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대접하고 싶어도 생각대로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쩌다 생긴 돼지고기도 잡숫지 않고 소금에 묻어 두었다가 추석 때가 되면 그걸 익혀 제사상에 올려놓곤 하셨다.

조상뿐이 아닌 먼저 돌아가신 아버님 산소에도 추석이 오면 꼭 돼지고기를 삶아 올리셨다.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돼지고기를 무척 좋아하셨는데 내가 12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임종을 직접 봤는데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이 각박한 세상에서 당신이 저 도깨비들을 어찌 키우겠소. 먼저 가는 내가 미안하고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소”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때 아버지의 머리맡에는 학교에 다니는 형과 누나 그리고 내가 앉아 있었는데, 평소에 늘 어른스럽게 나를 훈시하는 형을 힐끗 쳐다보며 “형도 나와 똑같은 도깨비였어?”라고 소리쳐 엄마의 꾸지람을 들었다. 이후 형에게 한 대 단단히 얻어 맞기도 했다.

다음 해 추석이 오자 나는 군침을 삼키며 산에 갈 채비를 했다. 아버님 산소에 가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덤 앞 댓돌에 놓일 음식과 돼지고기가 욕심나서였다. 어머니는 추석 제사상에 늘 햇곡식을 정갈하게 절구로 찧어 정성껏 밥을 지어 올려놓곤 하셨다. 북한 함경북도는 추운 지대여서 8월 추석이 9월로 당겨질 때에는 햇곡식 얻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미리 남쪽인 황해도 쪽에 나가 햅쌀을 구해오곤 하셨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그럴 이유가 따로 있었다.

해방되던 해 추석, 제삿밥을 짓기 위해 구들에 벼를 널어 말리고 있었는데 당시 3살이었던 큰누나가 어정어정 걸어가 널어놓은 벼 가운데에 오줌을 쌌다고 한다. 밖에서 들어오며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 애를 옆에 물린 다음 오줌에 젖은 벼를 급히 모아 치우고 젖지 않은 벼를 찧어 제사를 지냈다는데, 이상하게도 추석날 저녁부터 큰누나가 고열로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의원을 불러 침을 맞고 약을 썼으나 전혀 차도가 없었다.

며칠 고민하던 어머니는 짚이는 것이 있어서인지 다시 논에 나가 잘 여문 벼를 잘라다가 아랫목에 말렸다. 그걸 찧은 쌀로 진지를 지어 다시 제사를 지냈다. 놀랍게도 즉시 효과가 일어났다고 한다. 제사상을 물리기 바쁘게 고열에 시달리던 큰누나가 “엄마, 나 밥” 하며 초롱초롱 두 눈을 빛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것이다. “에이 거짓말. 엄마는 미신쟁이”라고 이야기를 듣던 나와 형이 혀를 빼물었는데,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천둥같이 화를 내셨다. 조상을 그렇게 성의 없이 모시면 언제든 화를 면치 못한다고 말이다.

햅쌀밥, 돼지고기, 단 한 번도 제사상에 올리지 못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1995년 추석에 어머니는 아껴둔 재료로 할아버지 일가와 아버지가 묻힌 산소에 정성껏 음식을 차리셨고 그해 12월 세상을 떠나셨다. 다음 해 추석 때 나는 어머님의 제사상에 햅쌀밥이 아닌 옥수수밥을 지어 올렸다. 식량 미공급과 함께 햅쌀은 물론이고 묵은 쌀도 구할 수 없어서였다. 어머니가 생전에 그토록 즐기시던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탈북하기까지 8년간 단 한 번도 돼지고기는 물론 햅쌀밥을 지어 올리지 못했다.

지금도 그것이 늘 아픈 기억으로 심신을 괴롭힌다. 언제면 북녘땅에도 서광이 비쳐 대접하고 싶은 좋은 음식을 돌아가신 부모님들 상에 부담 없이 올릴 수 있는 세상이 올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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