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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탄소하나 산업의 기원을 찾아서 | 일제의 패망 … 직격탄 맞은 아오지 인조석유공장 201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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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탄소하나 산업의 기원을 찾아서 3

일제의 패망 … 직격탄 맞은 아오지 인조석유공장

 박종철 / 경상대 통일평화연구센터 소장

 

1945년 9월 2일 도쿄만 해상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미군과 일본군 간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일본군 투항 사절단 중 한 명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

1945년 9월 2일 도쿄만 해상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미군과 일본군 간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일본군 투항 사절단 중 한 명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

1936년 1월 일본 정부는 제1차 런던 해군군축조약을 공식적으로 폐지한 후 해군과 공군을 확장하기 위해 해군에서 석유, 석탄, 연료 공장 8개소, 육군에서도 유사한 공장 4개소의 건축계획을 발표했다. 이 공장들에서는 무연탄, 항공휘발유, 함정정유, 인조석유 등을 생산할 계획이었다. 1939년 1월 도쿄제국대학 연료연구소장 오시마 요시키요(大島義清)는 일본산 석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반도, 만주국, 타이완의 석탄 매장량을 분석하는 동시에 석탄액화와 인조석유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특히 오시마는 결론 부분에서 인조석유를 대량생산하려면 질 좋은 석탄의 채탄량을 증대해야 하고, 이를 위한 대규모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 해군은 6개의 연료창(燃料廠)을 설치했다<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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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1941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일본에 대한 ‘도의적 석유금수 조치’를 강화함에 따라 일제의 인조석유공장은 확대되었다<표 2>.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 석유의 70% 이상을 공급하고 있었고, 1939년 일제는 석유 수입의 9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석유봉쇄 조치는 일본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잇따른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석유를 확보하는 것은 일본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기에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곧 일제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석탄 산지 곳곳에 인조석유공장을 건설하였고, 곧 전국에 걸쳐 분포하게 되었다. 또한 건류법, 수소첨가법(베르기우스법), 가스화법(피셔-트로프슈법) 등 모든 인조석유 개발 기술을 총동원하여 석유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아오지 인조석유공장, 석유생산량 36% 수준에 그쳐

하지만 석유공장이 늘어나 생산설비를 갖추는 데까지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었다. 품질이 보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원인으로는 첫째, 전쟁 중에 외부에서 촉매제를 입수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고 둘째, 석탄에 포함된 유황 등의 물질이 기계부식 원인으로 작용해 생산능력을 저하시키기도 했다. 셋째, 가스화 공정을 이용해도 대량의 물을 수소분해해야 하므로 이에 따르는 상당한 양의 물과 전기를 필요로 하였다. 넷째, 직접액화법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효율이 30%에 이르지 못했던 점도 있다. 당시 아오지에 적용되기도 했던 직접액화법은 기술적 난제가 많은 공법으로, 현재 북한에서는 인조석유 생산시설의 대부분이 가스화법을 채택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솔(SASOL)조차도 직접액화법을 사용하지는 않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도 직접액화법은 일부 시험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인조석유공장의 설계능력에 비하여 일제의 실제 석유생산량은 60%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특히 아오지 공장의 경우는 설계능력 대비 석유생산량이 약 36%에 미치는 수준이었다. 일제는 1945년 항복하기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매년 20만t의 인조석유를 생산했다. 당시 기술은 100만t의 석탄이 있다면, 이중 30만t은 생산과정에서 필요한 연료용으로 썼고 나머지 70만t을 석유생산용 재료로 투입하여 총 20만t의 인조석유를 얻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전후 미국의 전략폭격조사단은 “전반적으로 일본의 화학기술 수준은 인조석유를 제조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난 호에서 만주와 조선, 그리고 일제와 나치독일이 주로 유혈암과 갈탄을 원료로 인조석유를 생산한 사례를 소개한 바 있는데, 타이완의 경우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타이완 제6연료공장은 1939년 완공되었는데, 본부는 남부에 위치한 가오슝 줘잉(高雄 左營)에 있었다<표 1>. 합성공장설비의 석유생산지는 신쭈(新竹)에 있었는데 이는 1940년 이후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공장시설을 이전했기 때문이었다. 타이완 제6연료공장의 역할은 고구마와 사탕수수 등 현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에서 석유를 추출해 항공휘발유를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대만총독부 천연가스연구소는 이 연구기술을 계속 추진했다.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의 잠수함이 일본의 해외수송로를 차단한 이후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에서 출발한 보급물자를 국내로 들여오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대안책으로 대만총독부는 국내에서 채굴 가능한 지하자원 생산량을 증대하는 동시에 특정 식물 등에서도 석유생산이 가능한 물질을 추출하는 기술에 집중했다. 이와 유사하게 당시 일제 역시 목탄, 아주까리 등 각종 농산물에서 석유제조에 필요한 성분을 추출하는 기술을 연구했는데, 해방 후 일본 내 조총련 계열의 화학자들이 북한으로 건너가 인조석유 개발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당시 타이완 인조석유 설비와 기술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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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색 짙어진 일제, 한반도 떠나며 산업설비 파괴 명령

한편, 북한 산업설비의 반복적인 ‘마비와 복구’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평양전쟁 말기부터 해방까지의 과정을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다.

1945년 8월 당시 일제는 전쟁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한반도와 만주의 주요 산업설비를 파괴하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소련군의 참전과 진격속도가 빨랐고, 특히 주요 산업설비는 낙하산부대를 투하하여 보호하는 등 소련이 신속한 산업설비 점령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일본 군부의 산업설비 파괴명령에도 불구하고 피해는 크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했지만,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는 소련군과의 전투가 지속되고 있었다. 8월 22일 일제 대본영이 재차 관동군에 항복을 명령하였고, 24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의 전투는 종결되고 마침내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다. 해방 당시 남북의 중공업 비율은 조선 북부가 남부 대비 수배의 규모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설비들이 북한 측에 곧바로 양도되지는 않았다. 철수 과정에서 일본인들에 의한 파괴활동이 있었고, 소련군 역시 전리품의 개념으로 설비를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해 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소련, 중국, 북한 당국은 일본 기술자들의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고, 이에 대응하여 도쿄의 최고사령부는 군사 분야인 석탄액화의 생산뿐만 아니라 연구까지도 금지조치를 내렸다.

결국 해방 직후 19개의 수력발전소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 북부 산업설비의 가동이 중단되었는데 석탄 등을 채탄할 수 있는 178개의 광산이 부분 침수되었고, 47개 기업이 파괴되었다. 특히 연료 부분의 설비는 가동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자동차와 선박의 운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1945년 11월 27일 소련이 북한에 공업 복구를 위한 기술자와 물자공급 방침을 발표하였고, 12월 18일 북한은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하며 산업설비 복구를 예고했다. 이에 따라 1946년 들어 북한의 산업설비가 복구되기 시작했지만 자력이 아닌 스탈린의 협조 아래 이뤄졌기 때문에 소련은 그 대가로 황금과 우라늄을 북한에서 반출해갔다. 같은 해 4월 북한 지역에 주둔한 소련군정은 김일성 측에 소련군정 관할의 주요 공업설비 1,600개를 인도(引渡)하였고, 석탄액화 설비도 제공하였다. 이후 8월 10일 김일성은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 법령을 발표하였다.

북한 측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1947년 1월 1일 당시 기업소 822개가 조업을 재개하였다. 이중 소련 기술자에 의하여 완전 혹은 부분 복구된 기업소는 228개이고, 남은 594개 기업소도 소련 기술자에 의하여 기술협력을 받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 측 발표는 신뢰성에 상당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평양 주재 소련 민정부 보고서에는 “아오지의 인공연료 공장은 복구 중에 있다. 가스 발생기 ‘빈크레르’에서 석탄을 연소시키기 위한 설비장치가 건설 중에 있으며 이것은 1일 175t까지 인공연료를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연간 메탄올 생산력은 1만5천t이다”라며 상당히 과장된 보고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당시 아오지 인조석유공장의 복구는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소련 민정부 조사에 따르면 1945년 해방 직전 아오지 공장의 석유생산량은 약 8만2천t에 불과했고 노동자는 5천명 수준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생산이 중지되었고, 노동자도 2천명만 남아있는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해당 보고서에는 북한의 석유 및 원유 문제에 대하여 “석유 등을 수입하지 않고서는 이용이 불가능하며 소련의 원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정은 원산에 ‘조·소(북한·소련) 석유회사’를 설립하였다. 소련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유한 석유를 원산의 ‘조·소 석유회사’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북한에 석유를 공급하였다. 북한은 물품가격을 현물로 지불했는데 철도를 통해 소련 극동으로 이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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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품 수요 및 석유가 하락 인조석유공장 중요도 급감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아오지 인조석유공장은 복구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었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수물품 수요가 급감하면서 석유가격이 하락하였고, 1947년 이후에는 급락하여 인조석유공장의 중요성은 더욱 감소하게 되었다.

한편 국공내전으로 중국 공산당 측의 산업설비가 북·중 국경에서 북한 측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47년 중국공산당 동북군 공업부는 탄환, 철강, 화학공장을 아오지로 이전시키기도 했다. 이후 1949년이 되어서야 아오지 인조석유공장도 일정 정도의 설비가 복구되어 재가동되었다. 같은 해 원산 석유공장의 설비 역시 복구되어 액체연료와 기계유 등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폭격으로 아오지 인조석유공장은 다시 생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아오지 인조석유공장의 복구는 북한과 소련 사이의 주요 현안 문제가 되었고, 김일성은 아오지에 원유가공공장을 건설할 수 있도록 소련 측에 제안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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