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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컷 속 북한 | 그들은 배지(badge)를 단다 201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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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컷 속 북한5

그들은 배지(badge)를 단다

변영욱 / <동아일보> 사진부 차장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보급되기 시작한 김일성·김정일 얼굴이 같이 들어간 ‘쌍상(雙像)’ 배지 ⓒ연합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보급되기 시작한 김일성·김정일 얼굴이 같이 들어간 ‘쌍상(雙像)’ 배지 ⓒ연합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지난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에도 나섰다. 국제적 관심이 쏠린 북·미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을 상징하는 3종류의 국가 상징물이 눈에 띄었다. 국기와 국장 그리고 김일성·김정일 배지였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싱가포르에서 만난 김 위원장 뒤에는 대형 성조기와 같은 크기의 대형 인공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국가의 상징인 국기 앞에서 김 위원장이 다른 나라 정상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은 국제사회에 정상국가 이미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국기뿐만이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서명식을 마친 김 위원장이 들고 있던 서류철 겉표지에는 북한을 상징하는 ‘국장(國章, 엠블럼)’이 보였다. 붉은 별과 백두산, 수풍댐 그리고 벼 이삭 그림으로 이뤄진 국장은 올해 김정은의 전용기와 전용차에도 등장했다.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모습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대통령을 상징하는 엠블럼이 있었다. 미국의 엠블럼과 유사한 북한의 엠블럼이 최근 등장한 것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국가의 상징을 만들거나 적극 알리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국과 북한 정치에서 엠블럼은 존재는 하되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우리 정부의 경우 1949년 ‘나라문장 규정 문서’를 펴낸 데 이어 1963년 무궁화 꽃이 태극 문양을 감싸고 있는 형태의 나라문장을 제정했지만 정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지는 않고 있다.

일상생활 및 공식행사, 반드시 김일성 배지 달아야

인공기와 국장 이외에 북한에는 또 하나의 상징이 있다. 바로 김일성 배지(badge)다. 배지를 북한에서는 휘장이라고 부른다. 김일성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된 1960년대 말 이후 북한 국적의 모든 사람들은 김일성 배지를 달아 왔다. 공사현장이나 청소 등 먼지가 나는 일을 할 때 입는 작업복에는 배지를 달지 않지만 일상생활과 공식행사에서는 반드시 김일성 배지를 달아야 한다.

김정일 배지의 경우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부터 공식적으로 허용됐지만 주로 당 간부들만 달았고, 일반 주민들은 주로 김일성 배지를 달았다고 한다. 김정은은 2010년 9월 공식 후계자가 된 이래 줄곧 김일성 주석의 초상 휘장을 달고 나타났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배지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김정은은 주로 젊은 시절의 김일성 모습을 담은 배지를 달았다.

김정일의 사망 이후에는 김일성·김정일 얼굴이 같이 들어간 ‘쌍상(雙像)’ 배지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배지에 비해 크기도 두 배로 커졌다. 쌍상 배지 속 김일성과 김정일은 이전의 초상화와는 달리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이른바 두 명의 태양상을 배지 속에 넣은 것이다.

북한에서 쌍상 배지를 처음 단 사람은 김정은 위원장으로, 2012년 4월 7일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사진 속에서 처음 확인된다. 김정은이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달고 나타난 것은 그와 북한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훈을 계승하겠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김정은의 착용 이후 쌍상 배지는 북한 사회에 공식 배지가 되었으며 권력의 크기 순서에 따라 착용하기 시작했다.

쌍상 배지의 배급은 북한 내부의 서열과 계층 순서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배급하고 일반 주민에게는 아직 공급 중인 상태다. 북한의 홍보 영상에는 주민들이 대부분 쌍상 배지를 달고 있지만 평양 시내에서도 아직 쌍상 배지를 배급받지 못한 주민들이 꽤 있다.

6·12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날 평양역에서 북한 주민들이 야외 스크린을 통해 전날 김 위원장의 싱가포르 야간 외출 보도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외신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 속 이들은 북한의 일반 주민이다. 기득권이나 엘리트층이라고 하기에도 어렵다. 이들의 옷차림과 거친 피부 때문이 아니다. 이들이 달고 있는 배지 때문에 그러한 추측을 해본다. 올해 초 평양에서 열린 한국예술단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은 쌍상 배지를 달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했던 태권도 공연의 경우에는 관람하는 북한 사람들이 대부분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다.

꼭 기득권이 아니더라도 뉴스에 등장해야 하는 경우 쌍상 배지를 우선 지급받는 것 같다. 2013년 5월 라오스에서 북한으로 재북송되었던 꽃제비 청소년들이 쌍상 배지를 달고 북한 방송에 출연한 것은 이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612일 싱가포르, 김정은은 왜 배지를 달지 않았나?

흥미로운 점은 이번 북·미정상회담에 나서면서 김정은이 북한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떼고 나타났다는 점이다. 트럼프와 폼페이오 장관 등 ‘Team USA’의 성조기 배지처럼, 김여정과 최선희 등 ‘Team North Korea’의 모든 수행원들은 쌍상 배지를 달고 나왔다. 하지만 김정은은 남북정상회담, 북·중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에도 배지를 달지 않았다.

사실 2015년 여름부터 김정은과 부인 이설주는 간헐적으로 쌍상 배지를 달지 않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다. 쌍상 배지를 가장 먼저 달았던 최고지도자 부부가 가장 먼저 배지를 떼기 시작한 것이다. 선대로부터 독립적인 지도자의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중국의 지도자들조차 마오쩌둥 배지를 거의 달지 않는 국제정치의 표준을 따르기 위함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김정은의 가슴에서 사라진 김일성·김정일 배지. 이게 북한 변화의 상징이기를 기대한다. 그는 어쩌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산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는지 모른다. 북한 인민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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