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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강대국 간 경쟁과 협력 속 기민한 외교로 성장한 아세안 201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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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사람, 번영 그리고 평화 … 신남방정책의 미래는?

강대국 간 경쟁과 협력 속

기민한 외교로 성장한 아세안

배기현 /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인도를 국빈 방문한 문대인 대통령이 지난 7월 9일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노이다시 삼성전자 제2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모디 인도 총리와 휴대전화 등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

인도를 국빈 방문한 문대인 대통령이 지난 7월 9일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노이다시 삼성전자 제2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모디 인도 총리와 휴대전화 등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제일 먼저 미국과 중국을 떠올린다. 우리의 외교를 말할 때면 먼저 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국익과 외교 방향을 파악하고, 그들의 외교 전략을 평가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데 주력한다. 그 과정에서 주요국이 아닌 국가, 작은 국가들의 외교정책, 전략, 방향은 학문적, 정책적 논의에서 소외되는 것이 다반사다. 이는 국제질서를 만들거나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강대국(혹은 주요국)이라는 현실주의적 전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비강대국, 때로는 약소국이라 할지라도 어떤 국가들은 국제질서를 변화시키기도 하고 국제질서의 주인공으로 간주되는 강대국의 외교 방향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는 역사책에서 드문드문 찾아볼 수 있는 사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우리와 가까운 지역에서도 역동적 외교를 통해 질서에 영향을 끼쳐온 작은 국가들이 있다.

신생 동남아국, 적극적 참여 외교로 외세 간섭·개입 극복

신남방정책에서 주목하는 동남아시아는 이처럼 노련한 외교 역사를 지닌 곳이다. 단지 지금까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냉전 시기부터 다수의 동남아 국가들은 어느 한쪽 편에 매달리지 않는 중립적 입장을 원칙적으로 선호해왔다. 그러나 동남아 국가들의 외교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면, 작은 나라 혹은 비강대국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중립성을 표방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국제정치에 참여하여 동아시아 질서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하고, 강대국들의 외교 정책 방향에도 영향을 끼치고자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신생 동남아 국가 엘리트 다수는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두 가지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선, 간섭과 개입의 두려움이다. 외부 세력의 쓰라린 식민통치 경험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생 약소국으로서 생존에 필요한 국방, 경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에 외부의 침입과 간섭에 노출되기 쉬운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주변화되고, 고립되고, 무시당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구조적 취약성을 극복하고 자주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의 물질적 지원도 필수적이다. 개입의 두려움 때문에 외부의 지원을 마다한다면, 부국강병은 더디거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즉, 외부의 간섭에 대한 불안이 연장되는 것이다. 물론 개별국가가 처한 상황에 따라 이 두려움의 크기는 달랐다. 하지만 이들은 합의의 방식을 통해 공동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기로 하였다. 각자가 여러 사안에서 이해관계를 달리했지만, 우선은 아세안(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이라는 10개국의 연합체를 만들어 외교 무대에 서고자 했다.

필자는 2015년 발표한 한 논문에서 1990년대 말 이후 아세안의 주목할 만한 네 가지 외교적 특징을 4C(Charter, Connectivity, Community, Centrality) 정책으로 명명한 바 있다. 첫째, 국가 지도자들은 아세안 헌장(ASEAN Charter)을 채택하여 아세안에 법인격을 부여하였다. 그 전까지의 아세안이 국가 지도자들 간 포럼 수준의 느슨한 연합체였다면, 아세안을 헌장이 있는 국제기구로 승격시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자 하였다.

둘째, 아세안 전역의 연계성(Connectivity)을 공동목표로 삼고, 이에 필요한 역내 각종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제도를 정비하여 역내외 투자를 끌어들였다. 셋째, 앞에서 말한 연계성을 기반으로 아세안 공동체(Community) 건설을 최종목표로 삼았다. 물론 아세안 공동체의 모습은 유럽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지만 유럽과 유사한 지역 통합을 목표로 동남아시아를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자 생산기지로 만들겠다고 천명하고 이를 실천 중이다. 넷째, 아세안을 중심으로 층층이 연결된 확대지역협의체를 건설하여 미국, 중국뿐 아니라 여러 주요국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이들이 동남아 문제에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주요 강대국들이 모인 국제 다자협의체가 주로 강대국 주도로 이루어져 왔다면, 아세안은 동아시아 다자협력체 내 아세안의 중심성(Centrality)을 규범화하고 ‘아세안 방식(ASEAN Way)’을 운영 규범으로 두어 협력 방향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자 했다.

아세안, 4C 구축 외교로 국제무대 영향력 확대 나서

동남아 국가들의 이 같은 외교정책은 위에서 언급한 엘리트들의 두 가지 두려움을 관리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적이었다. 국제사회에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영향력 있는 지역 기구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대외 주요국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까닭에 국제사회 내 아세안 패싱을 막을 수 있었다. 아세안 참가국 가운데에서도 캄보디아, 라오스, 브루나이처럼 국제적 위상이 아직 낮고, 국가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대외적 지원이 필요한 약소국에게 이 점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또한, 여러 국가가 동시에 아세안 문제에 참여하고 협력하게 되면서 강대국 일방의 원치 않는 개입의 두려움도 줄일 수 있었다.

특히 아세안의 외교 정책은 동아시아 리더십을 두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더 큰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태국을 제외한 대륙부 국가들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근접한 곳에 위치하며 이미 중국과 다양한 공식적, 비공식적 인적·물적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아세안에 가입했지만, 국가 발전 수준에서 해양부와 큰 격차를 보였기 때문에, 외부의 개발 지원에 대한 수요가 더 큰 곳이기도 하다. 특히 국제규범이나 규칙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 중국 정부의 적극적 개입과 투자가 얼마든지 가능한 곳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은 지도부가 환영할 일인 동시에, 중국의 직접적 영향력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두려움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륙부 엘리트들은 아세안을 통해 이웃국가들과 단합하여 여타 주요국들을 초대하고, 중국이 원치 않는 수준의 개입을 시도할 때 미국이나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여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제약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이 효과가 얼마나 되는지는 사안별로 다르겠지만, 이러한 외교 옵션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미국에 대한 견제도 가능하다. 동남아 주요국가 대부분은 동아시아의 리더로서 미국의 역할을 인정하고 강조하면서도,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무조건 따르지 않으려는 노선을 유지하는 편이다. 미국 및 여타 서방국가들이 투자를 조건으로 강압적으로 그들의 규칙을 이식하려 할 때, 이들은 합의와 비간섭주의 중심의 ‘아세안 방식’을 근거로 이를 반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미국이 동남아시아를 경시하거나 떠나지 못하게 막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아세안 외교 정책은 동남아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해주었다.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한쪽에게 양보하지 않는 한, 동아시아 내 제도적 역량을 쌓아둔 동남아시아는 두 강대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도 강대국 일방에게 편승했다가 개입과 간섭에 노출될 가능성을 줄이려면, 양국의 영향력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질서는 바람직하다.

일각에서는 이를 아세안의 세력균형 외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세력균형 ‘상태’를 추구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고 봐야 한다. ‘정책’으로써 세력균형은 상대방이 더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국의 군사력을 키우고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내용을 주로 포함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집단적으로 택한 아세안 정책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아미타브 아챠리아(Amitav Acharya)와 탄 시셍(Tan See Seng)의 지적처럼 동남아는 세력균형을 ‘정책’이 아니라 ‘상태’로 추구했다. 세력균형을 동아시아 질서의 모습으로 추구할 때, 정책의 내용을 굳이 군사적, 경제적인 것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었다. 즉, 국가의 힘과 상관없이 스마트한 외교 정책과 전략으로 힘과 영향력의 균형상태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한·미동맹 관계 속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우리가 동남아 외교를 무작정 따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동아시아 질서가 미·중 간 세력균형 ‘상태’인지, 아닌지에 대한 대답도 정권에 따라 바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력균형 상태를 추구하는 세력이 있다 해도, 어떻게 현재의 한·미동맹 구조와 동 목표를 양립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해결책은 속 시원히 내놓고 있지 못하다.

수동적 노선 탈피 지역적 전략 중요성 증대 노력 경주해

이처럼 처한 현실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 외교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분명히 있다. 특히 그들의 노련하고 끈질긴 행동가적 특성은 주목할 만하다. 첫째, 동남아 국가들은 강대국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해왔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양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이끌며 두 강대국 사이에서 세를 모으고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스스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안전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노선을 택하지 않았다.

둘째, 이들은 강대국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직접 강대국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새로운 수단과 외교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앞에서 살펴본 아세안 외교정책의 장기적인 효과와 장단점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그러나 아세안 외교가 동남아 질서 내 주요국 간 경쟁과 협력을 동시에 부추기고,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개발과 투자 이득을 챙기는 데 성공적이었다는 점은 여러 전문가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다.

동남아를 단지 신혼여행과 휴양의 목적지이거나, 우리 기업들이 돈을 벌 기회의 땅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도와줘야 할 개발도상 지역으로만 바라보던 지난날에서 벗어나 시각을 넓혀보자. 오히려 우리 정부와 다양한 외교 주체들이 관찰하고 배워야 할 이웃으로 이 지역을 이해하고 접근해보자. 그렇다면 신남방을 향한 외교가 무기력하게 사라진 지난 정권들의 정책과 다르게 대동아시아 외교의 질적인 변화와 도약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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