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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스토리 | 정말 더웠다 201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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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스토리 91

정말 더웠다

이지명 / 국제펜(PEN)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

올 삼복에 터진 폭염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에어컨 없이는 한순간도 버틸 수 없을 폭염 속에서 문득 북한 땅이 생각났다.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남한은 에어컨이라는 적극적인 조력자가 있지만 북한 주민들은 에어컨이란 말도 모른다. ‘평양공화국’이 아닌 ‘지방공화국’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올해의 삼복은 실제로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가 맞는가?’ 할 정도로 뜨거웠다. 웬만해선 에어컨을 멀리하는 나마저 그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밤에도 에어컨을 켜고 잤다. 전기세가 아까워 손이 떨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글지글 끓는 바깥을 창을 통해 내다보면서 북한에 있는 조카를 생각했다. 할 수만 있으면 전화를 해 ‘너, 지금 벌거벗고 다니지?’라고 놀리고 싶었다. 그러나 전화는 그쪽에서 와야만 할 수 있다. 문득 뙤약볕에 윗옷을 벗어제낀 북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한창 더운 삼복이면 북한에서도 노동시간을 조절한다.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음지에서 쉬도록 했다. 더위를 먹고 질식하거나 심지어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때면 가까운 웅덩이 물이나 작은 시내 물을 찾아 가던 때가 눈앞을 스쳤다. 집에 있는 여자들은 큰 함지나 나무통에 찬물을 붓고 몸을 담그는데 때로는 잠들기까지 한다.

민망함에 더위까지 싹 날아갔던 날

지금도 생생하다. 김일성 사망 당시 그해 7월은 북한에서도 엄청나게 더운 달이었다. 탄광에 볼 일이 있어 나갔던 나는 점심시간이 되자 더위를 참을 수 없어 뒷산 골짜기에 들어갔다. 마침 버들이 우거진 구석진 곳을 찾아 옷을 벗고 물에 몸을 담갔다. 그런데 시끌벅적 떠드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물을 찾아오는 거라는 생각에 나는 놀라서 눈만 내놓고 소리가 나는 쪽을 살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민망한 장면을 연출했다. 사람이 없는 줄만 알고 대여섯 되는 여성 농장원들이 기슭에 내려서자 자갈 위에 활활 옷을 벗어부치고 물에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별로 크지 않은 웅덩인데 이제 내 쪽으로 오면 어쩌나’ 확 소름이 끼쳤다. “아, 시원해” “살 것 같아” 여성 농장원들은 웅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웃어댔다.

나는 몸이 얼어들었다. 이럴 경우에 과정이 어찌됐던 물속에 숨어 있는 상황이 발각되면 파렴치한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늦은 때였다. 같은 웅덩이 물속에 옷벗은 상태였기 때문에 몰래 빠져 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물속에 숨어서 여자들이 목욕을 끝내고 먼저 가기를 기다릴 처지도 되지 못했다. 목욕보다는 더위를 피해 물속에 들어온 만큼 그것이 짧은 시간 안에 끝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순간 천 갈래 만 갈래로 환영이 떠오르고 앞이 캄캄해 뭐가 보이지도 않았다. ‘앗!’ 하는 비명이 터진 것도 그때다. 나를 발견한 여자들이 입을 벌린 채 나를 쳐다본다. 그쯤 됐으면 “어마나!” 하고 모두 도망갈 줄 알지만 북쪽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한참만에야 몸을 숨겼지만 물 밖으로 도망갈 기색은 전혀 없었다.

한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 걸음새가 아주 당당하다. 하긴 그 쪽은 여럿이고 나는 혼자니까. 당장 먼저 온 나를 나가란다. 나는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어떻게 나가냐?’고 볼멘 소리를 했다. 나 역시 옷이 없으니까 말이다. 여자가 돌아섰다. 함께 온 농장원들을 향해 몽땅 눈을 감으라고 소리쳤다. 까르르 또 웃음이 터졌다. 민망함에 더위까지 싹 날아갔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저녁에 탄광을 떠나 귀가하던 중 밭일을 하는 그 여자들과 또 마주쳤다. 마치 무슨 동물원 원숭이 보듯 일제히 나를 쳐다보며 키득거렸다. 아마도 눈을 감은 척 하면서 다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 와서 올여름 같은 폭염을 겪을 때면 나는 늘 그때 생각이 떠오른다. 에어컨이란 말도 모르는 사람들, 살인적인 더위지만 묵묵히 인내와 의지로 이겨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살인적 더위라도 묵묵하게 견뎌낼 수밖에 없는 그들

북한 정부는 주민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강인한 혁명정신으로 제기된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가는 사람이 진정한 충신이라고, 더위가 아무리 살인적이라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연의 현상이고 따라서 혁명전사가 자연 앞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설사 에어컨이 있다고 해도 사용하기 힘들다. 전기절약을 전면에 내세우며 1가정 당 전구 한등씩만 켜게 하고 전기밥솥 같은 가전제품 사용까지 통제하니 말이다.

실로 강한 의지로 더위를 이겨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 주민들의 삶이다. 그래서 나는 에어컨을 켤 때마다 늘 북녘의 가족형제들을 안쓰럽게 생각한다. 그와 함께 불볕더위 속에서도 선선함을 즐기는 내 모습을 조카들에게 애들처럼 입을 삐쭉하며 자랑하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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