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1년 3월 1일

특집 | 과거 남북군사회담, ‘본질적 군사문제’ 논의 못해 2011년 3월호

특집 | 남북군사회담 과거와 현재

과거 남북군사회담, ‘본질적 군사문제’ 논의 못해

이미숙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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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은 지난 1992년 2월 19일 제6차 고위급회담 공동발표문을 통해 남북군사분과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사진은 지난 1992년 3월 13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군사분과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남북 당국자들이 서로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군사회담을 군사 당국자가 군사적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하여 군사문제를 협의해 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한다면 남북군사회담은 1990년대 초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시작된다. 그 이전에도 남북한은 대내외의 공식석상에서 군사문제를 거론하였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군사제안이었지, 쌍방 간에 이루어진 회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북군사회담, 사실상 1990년대 초 시작

1990년대 초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남북군사회담이 남북고위급회담의 분과협상(sub-committee)으로 추진되었다.

남북고위급회담은 남북한 사이의 신뢰구축과 긴장완화문제를 포괄적으로 협의하는 총리회담이므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군사분야인 불가침문제를 원칙적으로 합의하였고 불가침분야 합의내용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협의는 「남북기본합의서」 제14조에 근거하여 설치된 남북군사분과위원회회담에서 군사당국자 간에 이루어졌다.

당시 북한은 탈냉전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남한으로부터의 흡수통일과 한·미 팀스피리트훈련을 최대의 위협으로 인식하였고 남한은 북한의 체제붕괴 가능성과 핵무기 개발을 우려하였으므로 ‘불가침’과 ‘팀스피리트훈련’이 주요 회담의제로 협상테이블에 올랐다. 남북한은 일정부분 공통된 이해를 가지고 회담의제를 협의한 결과 「남북불가침이행에 따른 부속합의서」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남북불가침협정과 군사적 신뢰구축에 논점을 둔 남한과 달리 북한은 군축과 주한미군 철수를 쟁점화하며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군축에 대한 구제적인 감축방안과 검증방법 등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이는 북한이 남한과 실질적인 군사문제를 협상할 의도가 없었지만 당시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군축 관련 내용을 대외선전용이나 위협용 또는 국면전환용이나 시간벌기용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 결과 남북군사회담은 합의결과의 이행은커녕 3사단 비무장지대 무장공비 침투(1992.5)와 노동미사일 발사(1993.5) 등 북한의 합의결과 위반으로 ‘선언적인 군사회담’이 되고 말았다.

북, 실리차원에서 군사회담 활용

1992년 9월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을 끝으로 중단된 남북군사회담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개최된 제1차 남북국방장관회담으로 꼭 8년 만에 재개되었다.

6·15 이후의 남북군사회담은 남북장관급회담의 분과협상(sub-committee)이 아니라 군사문제 전담협상(main-committee)으로 추진되었다. 6·15이후 남북군사회담에서는 남북국방장관회담과 남북군사실무회담 및 남북장성급군사회담을 통해 군사 당국자가 군사문제를 협의하였다.

당시 남한의 강력한 요구도 있었지만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으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북한은 남한과 ‘철도·도로연결’과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 및 ‘서해해상 충돌방지’ 관련 의제를 협의하였다.

그 과정에서  「군사보장합의서」, 「서해해상에서 우발적 충돌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 등 많은 합의를 도출하였고 군사합의에 대한 최초의 이행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해 실리적 차원에서 군사회담을 활용하였다.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한 북한은 남북군사회담에서 ‘철도·도로연결’ 합의를 통해 경제적 실리를 챙겼고,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 합의를 통해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던 선전수단을 제거함으로써 군사적 실리를 챙겼다.

그 결과 남북군사회담은 전담협상으로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리적인 군사회담’ 수준에 머물러 여전히 북핵문제, 군축 등 본질적인 군사문제를 협의하지 못했다.

이처럼 남북군사회담이 전담협상화되어 군사문제를 본격적으로 협의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갖추고도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본질적인 군사문제’를 주요 쟁점화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대표적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북한이 대내외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체제보장을 위해 ‘군사문제의 대미협상’이라는 원칙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은 북한을 남북군사회담의 1차적 당사자로 보나 북한은 미국을 군사협상의 ‘실질적 당사자’로 인정한다.

1990년대 초 북한이 ‘불가침’이나 ‘팀스피리트훈련’ 등 군사문제를 남한과 협의한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실질적 당사자’인 미국과 회담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한을 활용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합의가 이행되지 않는 ‘선언적인 군사회담’이 되고 만 것이다.

2000년 6·15 이후에도 군사합의가 도출되었으나 ‘철도·도로연결’ 등 경제적 군사지원과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 등 초보적인 군사적 신뢰구축 단계에 국한되므로 ‘본질적인 군사문제’를 협의했다고 보기 어렵다.

북한이 진정으로 남한을 군사회담의 파트너로 인정한다면, 그들이 우선적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나 평화협정 체결 등을 포함한 ‘본질적인 군사문제’를 남한과도 실질적으로 협의해야 한다.

둘째, 북한의 남한에 대한 군사적 위기인식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체제위기상황에 봉착했을 때마다 회담을 제의해왔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로 인한 흡수통일에 대한 위협과 내부정치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불가침을 포함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고, 2000년 6·15 이후에는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남한과의 군사협상 테이블에 나와 ‘철도·도로연결’과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 등 경제적 및 군사적 실리문제를 합의하였다.

그러나 남북한 군사문제의 핵심인 북핵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미국과의 회담만 요구하였다.

즉 북한은 남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보다는 정치·경제적 체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남북군사회담을 활용한 것이다. 이는 북한이 남한을 정치·경제적 체제위협 대상으로만 인식할 뿐 군사적 체제위협 대상으로는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북군사회담은 군사문제보다는 군사외적인 논의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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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문제보다 군사외적인 논의에 집중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남북군사회담은 또다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도발 후 회담을 제안하는 행태를 보이는 북한은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남북고위급군사회담을 제의하는 등 대화공세를 펼쳤다.

지난 2월 8일과 9일 양일 간에 걸쳐 개최된 남북고위급군사회담 실무급 예비회담이 아무런 합의 없이 종료되었지만 김정은의 세습이후 정치적·경제적 위기에 처한 북한의 대화와 평화공세는 지속될 것이다. 더 이상 남북군사회담이 지나온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군사문제’를 반드시 협의하여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완화에 기여하여야 한다.

현재 남북관계의 군사현안인 천안함 피격사건이나 연평도 포격도발은 물론이고 북핵문제와 군축 등에 대한 진정성 있는 논의가 남북군사회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남북군사회담의 진정성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남북군사회담에서 ‘본질적인 군사문제’가 논의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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