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6년 10월 1일

Camera Focus | 고려인 초기 정착지, 카자흐스탄 바슈토베 언덕 2016년 10월호

Camera Focus

고려인 초기 정착지, 카자흐스탄 바슈토베 언덕

01 고려인 초기 정착을 기억하기 위한 비석. 한국어, 카자흐스탄어, 러시아어의 세 가지 언어로 쓰여 있다.

01 고려인 초기 정착을 기억하기 위한 비석. 한국어, 카자흐스탄어, 러시아어의 세 가지 언어로 쓰여 있다.

1937년 10월 9일,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우스토베 역에 버려지다시피 한 사람들을 맞이한 것이라곤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화물열차에 실려 이곳까지 오는 한 달여 동안 1만여 명이 죽었다. 허허벌판에 도착한 이들은 17만 5천여 명. 걷고 또 걸어 바슈토베 언덕에 다다른 이들은 맨손으로 토굴을 파 거처를 정했다.

그 해 겨울,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목숨을 잃었다.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이들은 이듬해 봄부터 물길을 내고 농토를 만들어 농작물을 수확해냈다. 고려인이 이 지역의 벼 재배 북방한계선을 개척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생각해 볼 때 놀랍기 그지없다. 더 나아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현지 주민들이 아사(餓死) 위기에 처했을 때는 농작물을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고기가 주식이었던 그네들에게 대체식량을 제공한 것이다.

오늘날 고려인은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CIS 국가에서 성실, 근면, 그리고 책임감의 아이콘으로 인정받는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거나 지원해주는 어떠한 도움도 없이 낯선 땅에 정착한 이네들을 떠올리면, 존경스런 마음과 애잔함, 씁쓸함 등이 한 데 뒤엉킨다. 푸르른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바슈토베 언덕이 황량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 아닐까?

02 초기 정착 기념비. ‘이곳은 원동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라고 삐뚤빼뚤한 한글로 새겨져있다. 03 고려인 공동묘지. 묘비는 세워져있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다. 04 묘비마다 사진과 간략한 신상정보가 새겨져있다. 한국 이름이나 성씨, 그리고 생몰연월일을 확인할 수 있다. 05 우스토베 역. 지금도 역사가 한적하지만 1937 년에는 철로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형태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슈토베 언덕까지는 차로 약 20분 소요된다. 06 우스토베 마을의 어린이들. 작은 놀이터에서 함께 어울려 놀고 있지만, 서로 다른 외모와 민족 정체성 등으로 인해 다툼이 생길 때도 있다고 한다. 0 7 고려인 4세대 어린아이. 한국말은 할 줄 모르지만 겉모습은 우리나라의 여느 어린이들과 다를 바 없다.

02 초기 정착 기념비. ‘이곳은 원동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라고 삐뚤빼뚤한 한글로 새겨져있다. 03 고려인 공동묘지. 묘비는 세워져있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다. 04 묘비마다 사진과 간략한 신상정보가 새겨져있다. 한국 이름이나 성씨, 그리고 생몰연월일을 확인할 수 있다. 05 우스토베 역. 지금도 역사가 한적하지만 1937년에는 철로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형태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슈토베 언덕까지는 차로 약 20분 소요된다. 06 우스토베 마을의 어린이들. 작은 놀이터에서 함께 어울려 놀고 있지만, 서로 다른 외모와 민족 정체성 등으로 인해 다툼이 생길 때도 있다고 한다. 0 7 고려인 4세대 어린아이. 한국말은 할 줄 모르지만 겉모습은 우리나라의 여느 어린이들과 다를 바 없다.

김가나 /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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