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7년 1월 1일

박계리의 스케치 北 | 중남미 가이아나, 매스게임에 매료되다 2017년 1월호

박계리의 스케치 北  61

중남미 가이아나, 매스게임에 매료되다

고원석·권성연  | ‘군중과 개인 : 가이아나 매스게임 아카이브’ 아르코미술관, 2016

고원석·권성연 | ‘군중과 개인 : 가이아나 매스게임 아카이브’ 아르코미술관, 2016

대학로에 있는 아르코 미술관은 <군중과 개인>(고원석, 권성연 기획)이라는 타이틀로 가이아나 매스게임 아카이브 전시를 한 바 있다. 아리랑 공연으로 익히 알려진 북한의 매스게임이 1980년대 중남미의 작은 나라 가이아나에 수출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전시장에는 1980~1990년대 가이아나에서 개최되었던 매스게임 관련 안무도식 스케치북, 카드섹션 회화도안, 컬러·흑백 기록사진, 사진앨범, 신문기사, 뉴스영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부채를 들고 부채춤을 응용한 것 같아 보이는 집단무용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끌렸다. 가이아나인들이 만들었다는 안무도식 스케치북 위에는 한글로 된 메모들도 적혀 있었다. 왜 가이아나라는 나라는 지구 반대편 북한으로부터 매스게임을 수입하였을까?

이 전시의 기획자 중 한 명인 권성연 씨는 1980년 2월 23일에 대해 회고했다. “1980년 2월 23일 중남미의 작은 나라 가이아나에서는 공화국 건립 10주년을 기념하여 전례 없던 공연이 펼쳐졌다. 운동장 무대 한편에 마련된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자 어린이들의 군무와 기계체조가 펼쳐졌고, 그 뒤 계단식 스탠드에서 1천여 명의 카드섹션 참가자들이 장관을 연출하였다.”

가이아나의 지도자, 북한 매스게임을 수입한 이유?

그의 소개글에 의하면 1980년에 벌어진 가이아나 매스게임의 탄생은 정치인 린덴 포브스 샘슨 번함과 관련된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가이아나의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1979년 가이아나의 수상이었던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북한 예술가들이 주도하여 만든 매스게임을 보고 매료되어 이를 수입하였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지시를 내려 북한의 예술가들이 직접 가이아나에서 매스게임을 지도하게 된다. 왜 가이아나의 지도자는 북한의 매스게임에 매료되었을까?

17세기부터 유럽인들이 가이아나 원주민들을 밀림으로 밀어내고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데리고 와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영국의 노예해방으로 아프리카인들이 흩어지자 인도와 중국의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196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가이아나는 인도-가이아나인, 아프로-가이아나인, 유럽인, 중국인, 원주민, 이외의 혼혈인들이 모여 사는 복잡한 다민족 국가였다.

300년간 식민통치 밑에 있던 이 복잡한 나라의 독립을 이끈 지도자 번함이 마주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다민족, 다인종으로 구성된 가이아나 국민들이 어떻게 하나의 국가적 정체성을 공유할 것이냐는 문제였다. 그러한 고민을 가진 번함의 눈에 북한의 매스게임이 보여주는 단체의 일사불란한 모습, 카드섹션을 통해 드러나는 강력하고 동일한 메시지는 그가 꿈꾸던 국가의 정체성이 실현된 모습이었다. 고도의 훈련을 통해 단체를 위한 규율에 개인을 맞추고, 개개인의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져 단체의 움직임으로 강력하게 등장하는 매스게임의 체험은 시각적 강렬함 만큼이나 지도자들을 매료시켰다.

이는 모던한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지도자들에게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 때 지도자들은 미개한 국민들을 계몽시키고자 정책 방향을 결정한다. 계몽되지 못한 국민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방종을 낳으며 따라서 규율을 체험케 할 규칙들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조직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착한 국민들로 계몽될 때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근대의 신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생각해보면 필자에게도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매스게임의 군무를 추었던 기억이 있다. 197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선배들은 카드섹션을 했던 기억을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미 근대기를 지나 포스트모던 사회를 관통해가면서 집단과 개인의 문제에 대해 다시 사고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개성과 인권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면서 퍼즐의 한 조각처럼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개인의 삶을 공허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집단의 이익이 개인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시스템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그 기저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생명체론을 강조하는 아리랑 공연의 일사불란한 매스게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근대 사회를 꿈꾸는 가이아나에서 바라본 북한의 매스게임은 제3세계 탈식민 약소국으로서 주체적이고 자생적인 국가의 서사와 시각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매우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왔던 것이다. 가이아나인들은 몇 달에 걸쳐 매스게임을 연습하면서 노예해방과 독립을 쟁취한 가이아나, 평화를 수호하는 가이아나, 가이아나의 아름다운 자연, 다민족을 강조한 이미지와 더불어 지도자를 위한 찬사의 메시지를 몸으로 체화시켜 냈다. 이 공연을 지도하고 관람하던 국민들에게 매스게임이 준 시청각적이며 심리적인 영향은 지금까지도 가이아나 시내의 이미지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니 그 체험의 강렬함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독립 이후 사회주의 나라로 가이아나를 변모시켰던 번함은 점점 독재자로 변모해갔고, 결국 체디 자간이 이끄는 국민진보당은 1992년 친미정권을 수립한다. 그러자 매스게임은 ‘구시대 독재자의 프로파간다’로 간주되어 폐지되었고, 관련 자료는 모두 소각되었다고 한다.

이 전시를 보면서 1970~1980년대의 세상을 다시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되었다. ‘모던’ 사회가 지향했던 국가주의 정체성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어떻게 벌어졌는지, 그 공통점들에 대한 지도 그리기를 해본다. 지금 그 중의 어떤 나라들은 포스트모던 사회로 진입했고, 또 어떤 나라들은 여전히 모던 사회를 살고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사회들은 이제야 모던 사회의 문제들을 깨닫고 또 다른 사회로 진입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한반도는 어디쯤에 있을까? 새삼 세상은 넓지만 같고, 같지만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긴 겨울날의 이른 아침이다.

박계리 / 미술사학자



댓글 0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 해야 합니다.

좋아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