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어요 | “북녘땅 슈퍼옥수수 보며 정말 뿌듯했죠” 2017년 3월호
만나고 싶었어요 | 김순권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
“북녘땅 슈퍼옥수수 보며 정말 뿌듯했죠”
Q.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펼쳐왔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는 1945년 해방 3개월 전 울산의 한 농어촌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하루 빨리 귀국해서 나랏일에 이바지 해야겠다는 생각에 졸업 시즌에 받았던 미국 회사들의 스카우트 제의도 만류하고 한국에 돌아와 농촌진흥청 말단공무원으로 입사했죠.
유학 시절부터 옥수수에 꽂혀서 ‘잡종(하이브리드) 옥수수 종자 개발’에 매진했어요. 다년간 연구개발을 거쳐 1976년에 강원도 홍천, 평창, 영월에 적응하는 다수확 옥수수 육종에 성공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기술지원 없이 개발도상국 스스로의 힘으로 개발한 최초의 옥수수 육종과 잡종 종자였죠. 그 다음에는 한국 옥수수의 동계 종자 증식을 연구했고, 미국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종자 생산에 성공했습니다. 연구 결과를 우리나라의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 경상북도 북부에 시험 해봤는데 옥수수 재배가 성공적으로 잘 되었어요. 당시 ‘옥수수는 밭의 쌀’, ‘제2의 녹색혁명’이라는 슬로건까지 등장하던 시절이어서 큰 주목과 기대를 받았죠.
1979년에 드디어 한반도 기후에 완벽하게 적응한 옥수수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고, 중국, 인도, 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와 당시 소련에 잡종 옥수수 재배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농업연구가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 것은 사상 처음이었을 거예요. 심지어 아프리카와 남미에도 기술을 전파할 정도였으니까요.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에 아프리카를 지원하는 유엔 국제기구가 옥수수 품종 재배에 성공하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이후 유엔 소속 연구소로 이직했어요. 당시 강원도 옥수수 신품종에 의한 농가소득 증대를 400억 원으로 보고했는데, 아프리카 대륙에 옥수수 혁명이 일어나면 죽어가는 5억 명의 아프리카 인들을 살릴 뿐만 아니라 한국을 도왔던 다른 국가들에 옥수수로 빚을 갚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결국 아프리카에 옥수수 재배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고 지금도 옥수수를 주식량 중 하나로 삼고 있는 것을 보면 큰 보람을 느낍니다. 1995년 8월에 17년간의 아프리카 옥수수 연구를 마무리하고 귀국하여 경북대학교 석좌교수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Q. 재단의 주요활동 목표가 ‘슈퍼옥수수’ 개발을 통한 식량문제 해소로 알고 있어요. 슈퍼옥수수가 무엇인가요?
A. ‘슈퍼옥수수’는 1976년 남한 기후 적응에 성공한 ‘수원19호’가 ‘superior corn’으로 불려 지면서 붙이게 된 이름이에요. 미국 옥수수 종자 회사 파이오니오사가 개발한 잡종 옥수수가 ‘오바 슈퍼1호’와 ‘오바 슈퍼2호’ 였는데, 이 종자는 옥수수 위축 바이러스나 악마의 풀과 공생하죠. 이 특성에 착안하여 지은 이름이에요. 북한의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잘 적응하는 옥수수 종자라는 뜻입니다. 수원19호(북한식 명칭은 강냉이19호)와 오바 슈퍼1호 및 오바 슈퍼2호는 재배 지역에서 30년 넘게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Q. 북한지원 사업을 진행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요? 처음 북한에 지원 사업을 시작하셨을 때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A. 1990년대에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옥수수 연구가 절실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간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의 개발도상국들에 개량된 종자의 옥수수를 전파하였고 생산량도 늘어나 세계식량안보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자부합니다만, 정작 우리 동포들을 생각할 때 가장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많은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싶었고, 신앙심으로 인한 사명감도 있었어요.
1998년 1월 공식적으로 북한을 방문했었는데요. 당시 북한동포 70%의 주식량이 옥수수(북한에서는 강냉이라고 부름)였고 재배 면적은 73만 ha였죠. 옥수수를 개발해 식량을 증산시킬 목적으로 국제옥수수재단을 설립했습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의 도움도 받았고, 북한 돕기와 남북 화해를 원하는 100개의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창설했죠. ‘북한 옥수수심기 범국민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미국 유학 중에 배운 기술로 개발한 옥수수 ‘수원19호’(수원 농촌진흥청에서 19번째 육종한 옥수수)에 남한 정부 직인을 찍어 북한에 전달했어요. 이 옥수수에는 ‘강냉이19호’ 라는 북한 이름이 붙여졌죠. ‘수원19호’는 당시 북한 제1의 다수확 품종이었던 ‘화성1호’ 보다 더 많이 생산됐습니다. 남쪽 동포들이 종자와 비료를 보내와 북한의 78개 협동농장에 옥수수를 심었죠. 북한 전국 25개 시범 지역과 7천여 개 협동농장에 옥수수를 심고 ‘옥수수 밭에 콩 심기 운동’까지 벌이면서 북한 동포 살리기 식량증산 사업이 동시에 진행되었어요.
15년간 사라졌던 된장과 간장이 옥수수 밭을 살리기 위한 콩 심기로 되살아났고, 콩우유 만들기로 북한 어린이, 임산부, 노약자들의 건강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자면 말로 설명하지 못할 뿌듯함이 가슴에 남아있어요.
이후 지속된 연구 끝에 북한의 기후에 적응한 5만 종의 새로운 옥수수 품종을 육종했습니다. 그 중에서 12종의 장려 품종을 선발하여 ‘수원19호’ 두 개의 원종 KS5, KS6을 북에 주었죠. 이것으로 북한은 스스로 연간 1천t 이상의 종자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100만t 이상의 옥수수를 증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옥수수뿐만 아니라 벼, 감자, 콩 재배까지도 과학적인 친환경 유기농 농법 바람이 일어났죠. 결과가 성공적이니 이후에는 북한도 당연히 협조적으로 나왔고요.
Q. 지난 10년 가까이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경협이나 대북지원, 구호활동 등도 위축되었는데요. 식량이나 의료품 등 인도적 대북지원 활동이 남북 간 정치적 대결국면과 맞물려 크게 영향을 받는 현재의 상황에서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무엇입니까?
A. 저는 1986년에 중국 정부의 특별초청으로 200여 종의 옥수수 원종(잡종을 만드는 부모 옥수수)을 가지고 방중해 옥수수 육종 연구를 지도해주고, 동북3성 80% 땅에 옥수수가 심기는 모습을 봤습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옥수수 바다였죠. 그러나 중국 정부는 잡종 옥수수 개발 기술을 북한에 전수해 주기를 은근히 꺼리는 게 사실입니다. 때문에 옥수수 증산을 위해 세워진 중국 닥터콘 종자 회사 시범 지역을 북한 과학자 5명이 우리 정부의 허가를 받고 방문하는 일도 있었죠.
7년 전 신의주에 큰 홍수가 나서 옥수수 생산과 연구에 큰 타격을 입었을 당시에는 중국 옥수수 종자 회사가 정부로부터 독립해 나온 상태였습니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정부의 허가 범위 내에서 북한의 옥수수 연구를 돕고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 북한의 옥수수 전문가들과 함께 옥수수를 심고 가꾸며 “통일되면 서울이나 평양에서 만납시다.”라고 건넸던 말이 생각납니다. 당연히 하루 빨리 남북이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함께 화해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북 간에 닫힌 문이 열려서 인도적 지원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북한도 핵과 미사일 실험에 매진하는 것보다는 슈퍼옥수수 생산 등으로 주민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을 고민하는 데 더욱 많은 신경을 쓰기를 바라고요.
이동훈 / 본지기자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 해야 합니다.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