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싶었어요 | “탈북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2018년 2월호
만나고 싶었어요 | 조현성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탈북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이동훈 / 본지기자
Q. 심층면접을 통해 탈북자의 남한 문화예술 수용태도를 분석했는데, 면접자들이 북한에 살던 시절 주로 접한 남한 콘텐츠는 어떤 것인지?
A. 탈북자가 북한에서 접하는 남한 문화예술 콘텐츠는 영화와 드라마입니다. 시청매체는 1990년대 중후반의 비디오테이프부터 현재의 메모리카드까지 변했지만, 주된 시청 장르는 드라마죠. 일일드라마는 편수가 길기 때문에 잘 유통되지 않고 미니시리즈 등을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인기 있는 드라마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 것과 역사 소재입니다. 오래됐지만 <가을동화>(2000), <천국의 계단>(2003~2004)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아요. “다음 편이 끊어질까봐 연속해서 4일을 보았다”는 감상평의 <가을동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세 번을 다시 봤다”는 의견의 <천국의 계단> 등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북한 영화에 감성적 느낌과 감동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여기서 감동이라는 것은 당과 수령을 위한 자기희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반면에 남한 드라마의 감정은 사회와 관계없는 개인의 슬픔에 초점을 맞추죠. 그러니 남한 드라마 주인공에 한없이 감정이입하는 것입니다. 조직생활이 기본인 북한에서 남한 청춘남녀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새로운 형태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든요. 그래서 한 탈북자는 이러한 드라마를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신문물”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역사 소재의 드라마 역시 인기가 있습니다. 조사 결과 탈북한 지 2~3년 정도인 20대 여성은 특별히 사극을 많이 봤는데요. <대장금>, <주몽>, <태왕사신기>, <이산>, <바람의 나라>, <자명고>를 즐겨보면서 역사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대장금>, <이산>을 제외하고는 북한에서 중요시하는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기에 낯설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요.
탈북자의 거의 대부분이 북한에서 남한 드라마를 상당한 수준에서 접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과 탈북의 연관성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한 드라마를 시청한 이후 북한과 대비되는 남한의 풍족함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삶을 동경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저 나라에 가도 살 수 있겠다” 정도의 느낌이지, “반드시 가야만 살 수 있겠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탈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중첩되는데 남한 영상물 관람은 하나의 촉발요인이 되는 정도라고 보여져요. 실제 탈북해 입국한 사람들은 남한 드라마를 열심히 보았다는 공통점보다 탈북하지 않을 수 없는 저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기의 사연을 남한 드라마 시청으로 등치할 수는 없겠죠.
Q. 탈북자들이 한국의 드라마, 다큐, 예능 등 다양한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특징이라면?
A. 탈북 이전에 북한에서 즐겨본 TV 프로그램이 드라마인 것처럼, 남한에 와서도 처음에는 드라마를 많이 봅니다. 밤잠도 안 자고 새벽까지, 길면 한 달 이상 드라마만 보고 있었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북한에서도 좋아했지만 몰래 보던 드라마를 마음껏 볼 수 있으니 소원을 푸는 느낌이라 계속 보게 되었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은 입국 초기와 비교하여 갈수록 드라마 시청시간이 줄어들게 돼요. 남한살이가 쉽지 않기에 드라마를 볼 시간이 많지 않고, 드라마가 자신의 실제 삶이 아님을 알아가기 때문이겠죠. 입국한 지 2~3년이 된 40대 남성은 아직까지 드라마가 매우 재미있지만 취업준비로 학원에 다녀야 하기에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습니다. 남한살이 2~3년 정도인 50대 여성 탈북자는 “처음에 와서는 드라마 1편부터 매일 빼놓지 않고 봐왔고 방송시간이 되면 주먹을 쥐고 달려 집으로 왔다”고 말했는데 “이후 우울증도 생기는 것 같고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의식적으로 드라마 시청시간을 줄였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드라마 시청 시간이 점차 줄어드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드라마 소재에 대한 선호가 분명해집니다. 탈북자가 좋아하는 드라마는 그들 표현대로 ‘생활적 드라마’로 많은 자녀를 둔 가족 이야기인데요. 사실성을 기반으로 가족애를 다루고 있죠. 예를 들어 <빛나라 은수>(2016~2017) 같은 드라마는 폭력성과 선정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가족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적지 않은 탈북자가 좋아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탈북자는 폭력, 불륜, 음모, 배신, 복잡한 남녀관계를 그린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드라마가 실재를 재현해야 한다고 믿는데, 지나친 폭력과 음모, 복잡한 남녀관계는 현실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처럼 여전히 사극을 좋아하는 것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든요.
또한 일부 탈북자는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기도 합니다. 남한살이 7~8년이 되는 한 50대 여성은 입국 초기 드라마를 주로 시청했는데 이제는 드라마를 더 이상 보지 않고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다큐멘터리라고 해요. 그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인간극장>, <MBC 스페셜>, <엄마의 봄날> 같은 휴먼다큐멘터리부터 <나는 자연인이다>, <한국인의 밥상> 등 자연과 일상을 그린 프로그램, 그리고 기부 프로그램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드라마는 허구 또는 과장이지만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의 생활, 진짜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여기면서 말이죠.
남한살이 7~8년이 된 또 다른 40대 여성도 드라마를 잘 보지 않습니다. 드라마에서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음모에 따라 죄를 뒤집어 씌우는 드라마를 보면 심장이 멎을 것 같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대신에 다큐멘터리를 즐겨봐요. 드라마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현실이며, 그 현실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기에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그것이 알고 싶다>와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조사 결과 예능이나 코미디 프로그램은 별로 인기가 없었어요. 특히 코미디 프로그램은 “감정이 맞지 않아 통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남한 코미디 프로그램은 어색하고 재미가 없는데 이것은 남한살이가 오래되어도, 또 나이가 젊더라도 마찬가지였어요. 다만 리얼리티 예능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연예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인데요. 면담 과정에서 <무한도전>을 좋아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1박2일>을 즐겨보는 경우는 꽤 있었습니다. 일상과 생활에서 웃음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것이죠.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프로그램의 선호 패턴입니다.
결과적으로 탈북자의 TV 드라마 시청에 나타난 특징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요. 거주 기간이 늘어날수록 시청 시간이 줄어들고, 북한에서는 남한의 모든 드라마를 시청했다면 이제는 드라마에 대한 선호가 분명해지며, 드라마 이외에 다큐멘터리 및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죠. 이 세 가지를 연계하는 핵심어는 ‘리얼리티’입니다. 드라마가 자신과 주변의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는가에 따라 시청시간, 선호 드라마, 선호 프로그램 장르가 달라지죠. 거주 기간에 따른 시청시간 감소는 험난한 남한 생활의 결과이지만 북한에서 열광하던 드라마가 자신의 삶을 반영하지 못함을 인지한 결과이기도 하겠죠.
Q. 여러 이유로 탈북한 면접자들이 한국에 입국한 이후 생활해 나가면서 그간 생각하고 있던 남한의 이미지가 실제 삶으로 경험해보며 많이 바뀔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남한 문화예술 콘텐츠를 접해가는 과정 중 어떠한 점에서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는지?
A. 북한에서 남한 드라마를 보면서, 고급 자동차 및 대기업 회장의 저택으로 요약되는 풍요로움과 사상성 없는 생활, 애틋한 사랑이 자신에게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불가능함을 알게 되죠. 남한 생활이 얼마 되지 않은 탈북자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발전된 경제의 화려함이 자신과 거리가 있음을 물론 알고 있지만, 체감의 정도가 낮기 때문에 여전히 드라마가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분주하기만 한 남한 생활이 지속될수록 체감 재미도 낮아지죠.
그래서 남한에 온 지 오래된 탈북자의 상당수는 드라마보다 현실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을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질 드라마를 보지 않은 것 역시 리얼리티의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북한에서도 이해하지 못하던 복잡한 남녀관계, 불륜, 배신, 음모, 폭력이 난무한 드라마는 낯설고 호감이 가지 않아요.
남한 거주 기간과 관계없이 TV 시청 프로그램의 특성을 보면, 탈북자들은 영상물이 실재(reality)를 그대로 반영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드라마와 영화를 하나의 창작물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로 인식하거든요. 마치 북한에서 수령 형상화 영화 <조선의 별>이나 소설 <불멸의 력사>를 창작이 아닌 사실인 것처럼 여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북한에서 역사와 예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던 그들이 이제는 남한에서 현실과 예술을 구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역사 드라마의 인기는 이 같은 인식의 결과입니다.
Q. 현재 한국에서는 특히 종편 채널 등에서 탈북자들이 출연해 북한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 많은데, 탈북자들이 입국해 이러한 프로그램을 보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A. 탈북자는 대부분은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의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이야기, 과장된 이야기라서 불편하게 생각해요. 출연자 경험담이 대체로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한정된다는 것인데요. 경제적 어려움이 남아있지만 이제는 북한 주민의 삶이 그처럼 극빈하지 않은데도 과장해서 말한다고 비판해요. 남한에 온 지 2~3년이 된 한 40대 여성은 “호랑이 담배 피울 때 소리를 지금도 하니까 내가 ‘어머 저 여자 부끄럽게 왜 이래, 이제는 안 그런데…’라고 한다”면서 아예 시청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나아가 어떤 탈북자는 북한을 소재로 한 상업주의 방송이라고 비판하기도 하고요. 반대로 일부 탈북자는 이 같은 프로그램으로 남한 젊은층이 북한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깁니다. 남한 생활 7~8년차인 한 60대 남성은 “조금이야 거짓말 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북한 문화를 이해하는 데야 많은 도움이 된다”고 평가하기도 했어요.
Q. 정부가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문화정책적 측면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으려면 어떠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는지?
A. 탈북자의 문화생활 활성화는 탈북자 정책에서 우선순위가 되기 어려워요. 실제 탈북자 정착지원 정책에서 문화생활과 관련된 사업이 거의 없으며, 탈북자 스스로도 소득·고용·복지 등에 더욱 관심을 두죠. 하지만 경제생활 향상을 위한 정책이 지금보다 활성화되고 실제 경제수준이 높아지면 탈북자가 온전히 행복해질 것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한살이 6~7년이 된 40대 남성은 “지금은 빨리 이 사회에 정착하고 어느 정도 취약계층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이고 그래야만 차후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해요. 그가 가족과 함께하는 문화생활은 아주 가끔 아이들과 극장에 가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가 말하는 ‘차후 생활’에는 문화생활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겠죠. 그의 말대로 빨리 중산층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때까지의 삶에서 어떤 즐거움이 있을지, 또는 중산층이 된 다음에도 어떤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경제적 안정의 과정에서 그리고 안정 이후에 정서적 만족을 위해서는 문화정책적 개입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실상 우리는 이들에게 정서적 즐거움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탈북자의 문화생활, 선호하는 TV 장르만 보더라도 이들은 문화예술 작품이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어야 한다고 여전히 믿고 있거든요. 따라서 북한에서부터 현재까지 탈북자의 삶을 문화적 측면에서 보다 세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문화정책적 개입이 성과를 낼 수 있겠죠.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문화 정책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성을 고려한다면 탈북자 지원체계, 곧 남북하나재단이나 하나센터 등 공공의 전달체계 또는 종교단체나 지원단체 같은 민간의 전달체계를 활용한 문화정책을 펼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여요. 이는 곧 문화체육관광부와 통일부 등 유관부처의 정책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어야 함을 의미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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