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WHY? | 터키 에르도안, 미국에 배수진 통할까? 2018년 10월호
글로벌포커스 WHY?
터키 에르도안
미국에 배수진 통할까?
이장훈 /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하면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말이 있다. 현재는 터키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은 과거 동로마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수도였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뉘게 된 395년부터 1453년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까지 전 세계를 통치했다. 오스만튀르크 제국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멸망할 때까지 470년간 세계를 좌지우지했다.
오스만튀르크의 유산을 물려받은 터키는 지정·지경학적으로 전략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동쪽으로 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를 접하는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를 모두 아우르는 전 세계 단 하나밖에 없는 국가다. 국토의 3.6%만이 유럽 땅이지만, 터키는 스스로를 유럽국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럽인은 물론 전 세계인들도 터키를 유럽국가로 인정해주고 있다. 동시에 국토의 96.4%를 차지하는 아시아, 그중에서도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국가가 터키이기도 하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전성기는 제10대 술탄인 술레이만 1세(1494~1566년)때였다. 술탄은 원래 아랍어로 ‘권력’을 뜻하는데 오스만튀르크 제국에서는 세속적 권력자인 동시에 종교적 권위자를 말한다. 현재 터키를 철권통치하고 있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술레이만 1세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1세기 술탄’으로서 터키를 ‘제2의 오스만튀르크 제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터키 억류된 미국인 브런슨 목사 문제로 갈등 촉발
미국과 터키가 미국인 목사의 억류 문제를 비롯해 주요 정책을 놓고 대립하면서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특히 양국은 상대국의 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각각 부과하면서 무역 전쟁까지 벌이고 있다. 양국 관계가 악화된 것은 무엇보다 터키가 억류하고 있는 앤드루 크레이그 브런슨 목사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 11~1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을 만나 미국이 이스라엘에 억류된 터키 여성 석방을 보장하고, 터키는 브런슨 목사를 석방한다는 데 잠정적으로 합의했다.
그런데 브런슨 목사는 석방되기는커녕 가택 연금된 상태다. 터키 정부는 2016년 10월 브런슨 목사를 당시 실패로 끝난 군부 쿠데타에 연루됐을 뿐만 아니라 ‘펫훌라흐 귈렌주의 테러조직’(FETO)과 쿠르드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을 돕고, 간첩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브런슨 목사는 1993년 터키에 입국해 2010년부터 서부 이즈미르에서 교회를 이끌면서 목회활동을 해왔다. 터키 법원은 브런슨 목사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브런슨 목사는 유죄 판결이 날 경우 최고 징역 35년을 선고받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브런슨 목사를 석방하지 않자 매우 분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월 13일 브런슨 목사를 석방하라면서 터키산 철강과 알루미늄의 관세를 2배로 부과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에 따라 터키산 알루미늄의 관세는 20%, 철강의 관세는 50%로 올랐다. 미국 정부가 이런 조치를 내리자마자 터키의 통화인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터키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브런슨 목사의 석방을 위해 터키를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는 이유는 브런슨 목사가 자신의 지지 세력인 기독교 복음주의 장로교회 소속이기 때문이다. 미국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오는 11월 6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봐서라도 브런슨 목사를 석방하기 위해 강경한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은 위대한 기독교인이자 아주 멋진 사람인 브런슨 목사의 장기간 억류에 대해 터키에 대규모 제재를 부과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공화당도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공화당의 주류세력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터키 정부가 자국에 머물고 있는 이슬람 성직자 펫흘라흐 귈렌을 송환하기 위해 브런슨 목사를 사실상 인질로 억류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터키 정부는 귈렌이 군부 쿠데타를 배후 조종한 인물이라고 지목해왔다. 터키 정부는 그동안 귈렌의 신병을 인도해줄 것을 계속 요청해왔다.
브런슨 목사 억류 사건이 양국 간의 갈등을 폭발시킨 도화선이 되기는 했지만 양국 관계는 시리아 내전을 겪으면서 이미 상당히 소원해진 상태다. 이유는 쿠르드족 때문이다. 미국은 최근까지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를 격퇴하기 위해 시리아 북서부 지역에서 활동해온 쿠르드 민병대인 인민수비대(YPG)와 협력해왔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인민수비대가 자국의 분리주의 반군인 쿠르드노동당(PKK)과 연계된 조직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때문에 터키 정부는 지난 1월부터 독립국가 수립을 원하는 쿠르드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인민수비대를 공격해 왔다.
쿠르드족 문제로 미국–터키 관계는 이미 소원해진 상태
게다가 터키 정부는 쿠르드족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이란 정부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수니파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터키 정부가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의 관계를 강화해 온 것은 에너지 때문이다. 터키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전혀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이란으로부터 에너지를 수입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터키 정부가 미국의 이란 제재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것도 미국과 터키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쳐왔다. 터키와 러시아는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흑해의 패권을 놓고 크림반도에서 6번이나 전쟁을 치르는 등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였다. 특히 냉전시대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옛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나토를 창설했고, 터키도 회원국이다. 시리아 내전에서도 터키는 미국이 지원하는 시리아 반군 편에 섰고, 러시아는 이란과 함께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지원해왔다.
그런데 에르도안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관계가 2016년 터키 군부 쿠데타를 계기로 밀접해졌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군부 쿠데타를 진압한 후 철권통치를 강화해온 에르도안 대통령을 비판하자, 에르도안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또 에너지가 없는 터키의 입장을 고려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4월 초 앙카라를 방문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최신예 방공미사일 시스템인 S-400을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터키와 계약한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35 21대의 인도를 유예시켰다.
미국 정부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철저한 이슬람주의자라는 점에도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스탄불 시장을 지내던 1998년 한 집회에서 “이슬람 사원은 우리의 병영이며, 첨탑은 총검이고, 돔은 헬멧이며, 신도들은 우리의 병사”라는 내용의 시를 암송해 이슬람주의를 선동한 혐의로 4개월 복역한 적이 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에르도안의 소속당인 복지당에 대해 세속주의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위헌 판정을 내리고 해산을 선고했다. 에르도안은 이에 굴하지 않고 2001년 이슬람주의를 추종하는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했다. 정의개발당은 2002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당수였던 에르도안은 2003년 총리가 됐다. 이후 2007년과 2011년 총선에서 연속 승리해 내리 3연임에 성공했다.
4연임을 금지한 당규에 따라 다시 총리로 나서지 못하게 된 에르도안은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고 임기를 5년 중임제로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해 2014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에르도안은 지난해 4월 개헌을 통해 94년간 유지하던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꿨다. 개정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5년이며 중임할 수 있고, 중임 임기 중 대통령이 조기 선거를 실시해 다시 당선되면 5년 추가 임기를 보장받을 수 있다. 에르도안은 지난 6월 실시된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사실상 종신 집권할 수 있게 됐다. 대통령 임기 만료 직전에 조기대선을 실시하면 오는 2033년까지 집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올해 64세인 에르도안은 앞으로 79세까지 집권할 수 있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 교리를 정치·사회 질서의 기본으로 삼아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되는 이슬람 국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데올로기다. 에르도안은 그동안 이슬람주의를 지향하는 각종 정책들을 추진해왔다. 예를 들어 밤 10시 이후 모든 공공장소에서 주류 판매를 금지하고, 종교 학교에서 히잡(머리를 덮는 베일)을 반드시 착용하도록 했다. 공립학교를 성직자 양성학교로 대거 전환했다. 필수 교과인 종교 수업을 시작하는 학년을 초등학교 4학년에서 1학년으로 낮췄다.
에르도안의 이슬람주의는 터키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1881~1938년)의 세속주의와는 정반대다. 케말은 1923년 터키를 새롭게 건국하면서 술탄제와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다는 조항을 「헌법」에서 배제하는 등 세속주의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웠다. 당시 케말은 이슬람 전통 복장을 폐지했고, 종교의 자유 보장, 남녀평등 교육, 일부다처제 금지, 여성들의 히잡 금지, 여성에 선거권 부여, 아랍문자 폐지와 알파벳 사용, 이슬람력 폐지 등 터키를 서구화된 국가로 변신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케말의 세속주의 덕분에 터키는 이슬람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나토에 가입했고, 유럽의 일원이라는 말도 들어왔다.
철권통치 에르도안, 미국 압박에 얼마나 버틸 수 있나?
그렇다면 에르도안이 앞으로 미국의 압박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까? 터키는 현재 리라화 폭락 사태에 따른 외환위기에 직면해있다. 근본적으로 해외 자본 의존도가 과도하게 높기 때문이다. 터키의 대외부채 규모는 4,600억달러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55%에 달한다. 에르도안은 총리로 집권한 2003년부터 외국 자본을 끌어와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방식 등으로 경기를 부양해왔다. 이 때문에 터키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막대한 부채가 문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지난 2/4분기부터 달러 강세 흐름이 시작되면서 신흥국들은 달러화로의 자금 유출을 막고 자국 통화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잇달아 기준금리를 인상했지만, 터키는 금리를 동결했다. 에르도안이 대선을 앞두고 금리 인상에 따른 가계 및 기업 부담 증가를 두려워해 금리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터키는 연평균 2천억달러의 외채를 갚아야 하지만 더 이상 자금을 빌리기 어려운 만큼 자칫하면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에르도안은 터키의 외환위기를 서방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미국에 대해 “다른 친구와 동맹을 찾아 나설 수 있다”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하지만 이란을 비롯해 러시아와 중국이 정치·외교적으로 반미연대를 통해 터키를 어느 정도 지원할 수는 있겠지만, 터키의 외환위기에 버팀목 역할을 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에르도안이 앞으로 미국의 공세를 장기간 버티기는 어려울 듯하다. 소너 카갑타이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브런슨 목사를 석방할 때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은 계속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에르도안이 터키의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미국과 타협하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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