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교사의 생생이야기 | 양학선·최성봉,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2014년 1월호
탈북교사의 생생이야기 13 | 양학선·최성봉,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여기 벅찬 감동을 선사한 두 청년이 있다. 한 명은 지난해 런던올림픽에서 우리 국민을 짠하게 만든 ‘도마의 신’ 양학선이다. 한국체조 사상 올림픽 첫 금메달을 안겨주어서만은 아니다. 이후 방영된 그의 집 사정 때문이었다.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스포츠 스타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집은 탈북자인 나로서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 저런 집이 있다니? 저런 환경에서 어떻게 금메달을 딸 수 있지?’
다른 한 명은 최성봉. 부모의 이혼으로 세 살 때 서울의 한 보육원에 맡겨졌던 아이. 버스터미널을 집 삼아 터미널 주변 유흥가에서 껌팔이로 살던 소년. 이 청년은 한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천상의 목소리로 넬라 판타지아를 불러 벅찬 감동을 주었고 그 감동의 물결이 전 세계로 번져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지 어려운 환경만이 아니다. 바로 이들이 1990년대 생. 북한으로 말하면 ‘고난의 행군동이’들이다. 과연 ‘이들이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예체능 교사들 전국 학교 돌며 학생 선발
북한에서는 예체능 교육을 흔히 전문가 후비양성 교육이라 명명한다. 예술인 후비양성은 자강도 강계에 있는 ‘2·16예술전문학교’를 시범 운영해본 후 전국에 8년제 예술전문학교(지금의 예술학원)를 설립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학과는 기악, 성악, 미술과가 있었다. 특히 김정일의 문화예술부문 지도로 무대 예술인들의 인지도가 대단히 높아 기악과와 성악과의 인기가 좋았다. 과정은 소학교 1학년 과정부터인데 기악은 소1, 성악과 무용은 발성기와 성장기가 시작되는 중4, 미술도 중4학년부터였다.
당시의 모집 방법은 전공 교사들이 인민학교(초등학교)들에 직접 찾아가 4학년 졸업생들 중 인물, 체격이 좋은 아이들을 현장에서 간단한 청각, 음정, 박자, 무용 동작을 시켜보는 식으로 뽑은 다음 시험 통지서를 보내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학생들은 학급 단위로 일반 수업을 받고 개인별로 전공 수업을 하며 실력도 높았고, 전국 예술 경연 입상자들은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진학하였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은 지역에 있는 도 예술단·예술선전대에 취업하거나 중학교 교사나 소년회관 지도 교원으로 취업했다. 물론 여기서 북한 사회의 특유인 출신 성분이 반드시 고려된다. 아무리 실력이 높아도, 기량이 좋아도 출신성분이 좋지 않아 중앙대학이나 중앙 예술단체, 심지어 중앙당 5과에 뽑히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특히 설립 초기에는 한국 출신이나 귀국자 출신, 월남자 가족 출신들은 아무리 끼가 있어도 입학시험에 응시도 못했다.
예술? 재능과 끼보다 경제적 능력 우선
그나마 지금까지 언급한 건 국가의 사정이 괜찮았던 소위 ‘고난의 행군’ 이전이었다. 과정도 공정했다. 하지만 요즘 북한에서 예술을 배우려면 하늘의 별따기다. 아무리 예술적 재능이 있어도 나라 사정이 곧 개인 사정이니 돈이 없으면 꿈도 못 꾸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우선 전문교육에 앞서 학교들에서의 예술소조만 보아도 그 실태를 잘 알 수 있다. 악기 같은 경우 개인 악기가 있어야 하는데 돈 없는 대부분의 집들에선 언감생심이다. 악기가 있어도 학급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들을 고려한다면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난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연히 간부자식들과 무역업계 종사자, 일명 ‘돈주’라 하는 큰 장사꾼, 외국의 친척이 돈을 보내오는 집 자식들이 예술학원에 입학할 수 있다.
예술학원에서의 생활도 비슷하다. 악기 종류, 옷차림, 학용품, 생활용품 등에서 학생들 사이의 경쟁이 이뤄진다. 특히 요즘 미술 용품은 중국에서 전부 사야함은 물론이고 유럽산이나 일본산을 사용하는 이도 종종 있다. 물론 엄청난 고가이지만 물건 자체가 없기에 부르는 게 값이다. 웬만한 아이들은 꿈도 못 꾼다. 필자가 보건대 분명한 건 휴전선 너머 ‘사회주의 그곳’에 최성봉 같은 고아가 설 자리는 눈을 씻어가며 보아도 있을 수 없다. 원인은 붕괴된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교원들의 의식과 사회풍조를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처럼 자선단체, 개인 후원자도 있을 수 없다.
체육인 후비양성도 비슷한 형식이다. 소학교 4학년 단계에서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들을 위주로 모집하여 시험을 거쳐 입학시킨다. 문제는 종목을 나눌 때, 육체적 부담이 적고 메달 획득 가능성이 높은 종목은 중간급 간부자녀들이 하고, 육체적으로 고된 종목은 인민의 몫이다. 그래서 여자 축구 선수들은 대부분 농촌지역 출신이다. 한번은 그들에게 “왜 힘들게 축구를 선택했나?”라고 물으니 시내에 거주권을 붙이기 위해서라는 답변을 했다. 국제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면 평양시민권을 주는데 지방 거주민들에게는 운동이 충분히 매력 있는 제안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제7차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북한 마라토너 정성옥 역시 지방 출신에 집이 가난하여 늘 후보 선수, 페이스메이커였다고 한다. 당시에도 그는 김창옥 선수의 보조선수로 뛰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창옥이 감독의 전술대로 따르지 못하자 정성옥이 죽기살기로 달렸고 1등의 영광까지 차지한 것이었다. 당시 북한에서 정성옥의 파장은 대단했다. 예상치 못한 성적도 성적이었지만, 그가 귀국 후 체육 부문의 부정부패를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즉 실력이 좋아도 돈이 없으면 국제경기에 나가기 힘들고 일반선수로 뛰지 못하는 사정을 중앙당 간부들에게 다 말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 체제 특성상 당시에만 반짝 논란이 되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북한과 비교하며 양학선 선수가 전한 감동이 두 배로 다가왔고, 젊은 청년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한국이 대단한 나라라고 느껴진다. 이들을 통해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르며 북한을 생각해보면 그곳의 끼와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체제의 경직성과 경제파탄이 아이들의 꿈을 충분히 좌절시킬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정명호 / 전 양강도 혜산시 소재 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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