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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화유산 톡톡! | 개경 주변 120개 사찰 대부분 소실 … 일부 명맥 유지 2014년 1월호

북한 문화유산 톡톡! (마지막회) | 영통사, 관음사
개경 주변 120개 사찰 대부분 소실 … 일부 명맥 유지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전국적으로 대규모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수도였던 개경과 그 주변으로는 수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어 문헌에서 나타나는 고려시대 사찰의 숫자만 하더라도 120여 개에 이른다. 하지만 그 중 현재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데 이는 잦은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찰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개경과 그 인근의 사찰들은 전란으로 인한 파괴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개축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경우도 많았을 것이며, 특히 고려가 원제국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이후부터는 다양한 문물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개경과 인근의 사찰들도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영통사 전경

영통사 전경

영통사, 919년 숭복원에서 기원 … 남북 공동 복원

하지만 이마저도 현재는 대부분 남아있지 않으니 당시 수많은 사찰들로 채워졌을 개경의 모습은 상상으로만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몇몇 사찰들은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하고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92호인 영통사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으며 고려전기의 화엄종단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영통사는 919년 태조 왕건이 건립한 숭복원(崇福院)에서 시작하였는데 이는 태조의 증조부가 기거하던 암자를 확장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영통사는 고려왕실과 직접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는 사찰로 고려시대 당시 여러 왕들의 참배와 왕실 주관 불교행사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영통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출가하여 천태종을 개창한 곳으로 입적 후에 그의 공적을 기린 대각국사비가 세워져 있다. 대각국사비의 비문은 제작 당시 인종의 지시로 김부식이 작성하였는데 이 비문을 통해 당대의 승려인 의천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다. 1671년 김창협이 저술한 〈유송경기〉에 따르면 사찰은 이미 소실되었고 12~13동의 부속건물과 마당의 석탑 3기, 대각국사비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어 17세기 무렵에는 고려시대 기록 속의 영통사는 이미 옛 영화 속으로 사라져 버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음사 대리석관음보살좌상, 고려시대 석조 불상 대표

관음사 내 관음보살상

관음사 내 관음보살상

이러한 영통사에는 현재 북한의 국보로 지정된 영통사 5층탑과 서3층탑을 비롯하여 보물급인 동3층탑, 대각국사비 그리고 당간지주만이 본래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얼마 전까지 남한의 불자들과 관광객이 다녀갔던 영통사는 본래의 영통사가 아니었던 것일까? 아쉽게도 현재의 영통사는 발굴조사 이후 2005년에 새롭게 복원된 것으로 현재 29동의 건물이 복원되어 있는 상태이다. 특히 복원과정은 남측 천태종의 지원을 바탕으로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였으며 현재 건물 지붕에 덮여있는 기와는 남측의 천태종에서 지원한 것을 사용한 것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된 영통사는 일주문을 지나서 자리하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주요 전각 6동이 1,200여 평의 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다.

북한 국보유적 제125호인 관음사는 개경도성의 배후산성인 천마산성(天魔山城)에 위치한다. 천마산성은 성거산성(聖居山城)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고려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성은 둘레는 약 10.1km, 높이 약 4~8m인 석성으로 현재는 북문에만 문루가 남아있으며 나머지 문들은 홍예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성의 내부에는 명승지인 박연폭포가 있으며 뒤 골짜기를 지나면 관음사가 자리한다. 관음사는 광종 21년인 970년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이 굴속에 관음보살상 2기를 두고 ‘관음굴(觀音窟)’이라 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조선 개국 후 태조 2년인 1393년 크게 확장하였고 1395년에는 태조가 수륙재(水陸齋)를 열기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인조 24년인 1646년에 중수한 것으로 대웅전과 승방 및 높이 4.77m의 7층탑과 관음전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대웅전은 1.7m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은 겹처마를 댄 우진각지붕을 올렸다. 대웅전에는 아미타불 좌상, 관음보살 입상, 대세지보살 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관음사 경내에 자리하는 관음굴에는 국보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좌상이 자리하는데 화려한 보관과 영락, 천의 등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고려시대 석조 불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본래 보살상은 2기로 하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드리웠으며, 하나는 팔을 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전자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으로 이동해 보존하고 있고, 후자는 관음굴에 그대로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작성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에서는 현재의 관음굴에 자리하는 보살상과 같이 팔을 들어 올린 보살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제가 작성한 자료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지금 관음굴에 모셔진 보살상이 이후에 수리 혹은 복제된 것일까?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만 늘어갈 뿐이다.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관음사 보살상을 꼼꼼히 살펴봐야겠다.

박성진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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