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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 타임머신! | 통일외교 성과, ‘2+4’ 조약 … 독일 주권 완전 회복, 핵무기 갖지 않기로 2014년 12월호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 | 독일통일 타임머신! 8
통일외교 성과, ‘2+4’ 조약 … 독일 주권 완전 회복, 핵무기 갖지 않기로

1990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 4대 전승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은 독일과 베를린에서 특별권한을 행사하였으며, 해당 지역은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출처 : Creative Commons)

1990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 4대 전승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은 독일과 베를린에서 특별권한을 행사하였으며, 해당 지역은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출처 : Creative Commons)

찰리 검문소는 냉전시대에 동서독 분단을 상징했던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간의 주요 통행로들 중 한 곳이었다. 찰리 검문소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건설된 이후에 외교관이나 4대 전승국 군 관계자들이 국경을 넘을 때 사용하기 위해 설치했던 국경 검문소였다. ‘2+4’ 회담이 시작되었던 시점인 1990년 6월 22일에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박물관이 생겨났다.(출처 :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찰리 검문소는 냉전시대에 동서독 분단을 상징했던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간의 주요 통행로들 중 한 곳이었다. 찰리 검문소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건설된 이후에 외교관이나 4대 전승국 군 관계자들이 국경을 넘을 때 사용하기 위해 설치했던 국경 검문소였다. ‘2+4’ 회담이 시작되었던 시점인 1990년 6월 22일에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박물관이 생겨났다.(출처 : 독일연방문서보관소)

2014년 10월 말에 서울에서 통일과 관련된 외교적 사안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한국과 독일의 인사들로 구성된 자문 그룹이 첫 회의를 가졌다. 한국 측 대표는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이 맡았으며, 독일 측 대표는 오랫동안 독·한 의원 친선협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하르트무트 코쉭 의원이 맡았다. 이 자문 그룹은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 이후의 후속조치로 생겨났으며, 기존의 한·독 통일 자문회의가 국내 사안들을 주로 다루는 것에 반해 이 한·독 통일자문회의는 통일과 관련된 외교문제를 다룰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 통일 당시에 서독이 오랫동안 공을 들여온 신뢰구축 외교정책과 더불어 콜 정부의 뛰어난 외교를 통해 오랜 난제였던 독일 문제를 놀랍게도 신속하면서도 단순 명료하게 ‘2+4’ 조약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풀어냈기 때문이다.

독일은 1990년 초까지만 해도 통일을 방해하는 다음의 난제들을 맞고 있었다. 우선 독일은 완전한 주권국가가 아니었다. 제2차 대전 종전 이후에 동독은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에 놓여 있었으며, 동독에는 거의 50만명에 달하는 소련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서독도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특히 서베를린에서는 서방 연합국들의 권한이 지속적으로 유효하였다.

통일 전 동서독, 완전한 주권국가 아니었다

또한 통일독일의 동쪽 국경 문제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제2차 대전 이후에 슐레지엔, 폼메른 및 동프로이센과 같은 독일 동부 지역의 1/3이 소련 또는 폴란드로 넘어갔다. 동서독 공히 폴란드와의 협약을 통해 무력을 통한 국경의 동진(東進)을 거부하였으나 최종적인 해결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동쪽의 인접국가들은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해 국경선과 관련한 불안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서방 인접국들 또한 독일의 통일과정을 의심의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었다. 서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 공동체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으며, 서독의 연방은행은 유럽통화의 운명을 단독으로 결정할 정도의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많은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의 뇌리 속에는 여전히 제2차 대전의 기억이 살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통일독일의 독주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독일 사람들이 빨리 통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인접국들의 동의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독일통일에 대한 소련의 걱정이 사그라질 무렵인 1990년 2월에 동서독은 4대 전승국과 ‘2+4’ 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회담은 네 차례에 걸쳐 열렸는데, 1990년 5월에 본, 6월에는 동베를린, 7월에는 파리 그리고 9월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서 독일통일과 관련된 문제들, 즉 독일과 인접국들과의 관계 그리고 독일의 주권에 관한 의제들이 논의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 회담들을 통해 독일통일을 위한 외교상의 매듭을 짓는 목표를 매우 신속하게 달성했던 만큼 극적인 장면들도 많이 연출되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은 독일통일을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실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요구들을 함으로써 통일을 저지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통일독일이 나토에 가입하는 동시에 나토 군이 동독 지역에서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게 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요구를 하면서 이를 소련이 거부할 것이라 예상했다.

‘2+4’ 조약을 통해 독일은 국가의 완전한 주권을 다시 찾게 되었다. 독일의 가장 대표적인 TV 뉴스 프로그램인 ‘Tagesschau’를 통해서 ‘2+4’ 회담에 대한 내용을 알리고 있는 모습(출처 : Tagesschau)

‘2+4’ 조약을 통해 독일은 국가의 완전한 주권을 다시 찾게 되었다. 독일의 가장 대표적인 TV 뉴스 프로그램인 ‘Tagesschau’를 통해서 ‘2+4’ 회담에 대한 내용을 알리고 있는 모습(출처 : Tagesschau)

통일독일의 독주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1990년 3월 14일 서독 외교부에서 처음 열린 국장급 ‘2+4’ 회의 모습. 가장 오른쪽이 서독 회담 대표인 디터 카스트룹 박사,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한스-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교부 장관이다.(출처 : Creative Commons)

1990년 3월 14일 서독 외교부에서 처음 열린 국장급 ‘2+4’ 회의 모습. 가장 오른쪽이 서독 회담 대표인 디터 카스트룹 박사,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한스-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교부 장관이다.(출처 : Creative Commons)

그러나 소련이 독일의 통일을 거부할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미국과 독일의 우호관계에 대한 판단은 모두 적중하지 못했다. 당시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는 동시에 해체의 난관에 봉착해 있던 소련은 새로운 독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하여 완전히 새로운 대(對)독일 정책을 구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이 독일통일에 대한 선입견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1990년 9월 12일에 마침내 ‘2+4’ 조약(공식명칭은 독일 관련 최종 규정에 관한 조약)에 대한 서명이 이루어 졌다.

이 조약은 국가 영토에 관한 규정과 독일이 핵무기 및 화학, 생물 무기를 가지지 않고 군 병력을 37만명으로 감축하며 1994년까지 소련군이 철수하고 전승국들의 특별권한이 종료됨으로써 독일이 국내정치 및 외교에 있어서 완전한 주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을 포함하였다. 이후 동독이 된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의 소련 관리 지역에서의 재산 몰수에 관한 특별 문서로 인해 추후에 오랫동안 법률적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는 소련과 연관된 요구사항이라기보다는 독일 국내의 문제가 되었다.

1945년 이후 국제법 상의 독일 영토 상황. 동쪽의 떨어져 나간 지역은 소련과 폴란드 관할이 되었으며, 베를린은 4대 전승국 관리 아래 놓이게 되어 4개의 구역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마침내 독일의 국경선이 확정되었으며 4대 전승국들에 의한 관리 지위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1945년 이후 국제법 상의 독일 영토 상황. 동쪽의 떨어져 나간 지역은 소련과 폴란드 관할이 되었으며, 베를린은 4대 전승국 관리 아래 놓이게 되어 4개의 구역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마침내 독일의 국경선이 확정되었으며 4대 전승국들에 의한 관리 지위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2+4’ 조약이 1991년에 4대 전승국으로부터 인준을 받았지만 끝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통일을 바로 앞둔 시점인 1990년 10월 1일에 4대 전승국들은 독일에서의 특별권한을 내려놓게 된다. 하지만 소련군은 1990년 12월 1일부터 체포명령이 내려졌던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에리히 호네커와 부인 마곳 호네커를 포츠담 소재 소련 군 병원에서 모스크바로 도피시킴으로써 권한 포기 원칙을 위반하였다. 이후 호네커는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였으며, 러시아에서의 상황이 불투명해지자 칠레로 이주하였고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부인은 아직도 칠레에서 살고 있다.

‘2+4’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분단되고 부분적으로만 주권을 가진, 불신을 받던 국가에서 우방국 및 동맹국들과 함께 하며 통일이라는 도전과제를 극복한 이후에 더 많은 국제사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유럽 중앙의 안정적이고 큰 나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성공을 위해서는 독일의 장기적인 안정과 신뢰가 주요 요인이었다.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조약으로 시작하여 나토에 가입함으로써 독일은 서방과의 연대를 지속하였다. 즉 독일은 서방 동맹국들과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함께 해 온 것이 아니라 가치체계를 공유해 왔으며, 이는 전혀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서방 동맹국들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정책기조는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동방정책을 실시하던 시기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1985년부터 유럽 차원의 단일 시장이 형성되면서 독일은 경제적으로 서방 인접국들과 더욱 강한 유대를 갖게 되었으며 교류의 체제는 더욱 활발하고 견고해졌다. 이러한 결과 마가렛 대처와 같은 서방의 국가 지도자들은 비록 불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독일의 완전한 주권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를 통해 독일은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명실상부한 중심국가가 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서독이 분단시절에 통일이라는 목표에 대해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70년대부터 동독의 물건은 유럽 시장에서 서독 제품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았다. 이로 인해 1990년 통일이 이루어지던 시점에 구동독 지역이 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였다. 이후에 유럽 공동체 내지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고자 했던 다른 모든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동독의 사례와는 달리 지난한 통합과정을 감내해야만 했다.

콜 총리, 소련 고르바초프 우려 잠재워

동쪽에 위치한 인접국들, 특히 폴란드와의 화해는 신 동방정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진정한 화해의 시작은 카리스마 있는 노동 운동가 출신의 정치 지도자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이전의 불법 졸리다르노스크(단결) 노조가 중심이 되었던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면서부터였다. 이 때부터 독일과 폴란드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독일과 프랑스 간의 관계에서도 1950년대에 양국의 공통점을 매개로 하여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 나갔는데, 청소년 교류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교류는 이후에 양국의 공동 교과서 위원회 결성으로 이어졌으며, 어려운 부분인 역사적인 청산작업을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수십년간, 부분적으로는 수백년간 쌓여왔던 적대관계를 극복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외적인 통일을 이루어 내는 데 있어서는 고도로 정교하고 치밀한 외교정책을 구사했던 헬무트 콜 정부의 공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소련 군대의 동독 철수 문제는 가장 어려운 과제들 중 하나였던 관계로 특히 헬무트 콜 총리의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을 하였다. 1990년 7월에 콜은 모스크바와 코카서스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서 그동안 다져온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서 소련의 우려를 잠재우는 데 성공하는 동시에 서방 국가들에게는 유럽통합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89년에 화폐통합 결정을 내린다. 이는 통화정책상으로 독일이 지녔던 권한을 새로운 화폐통합이라는 대의를 위해 일부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통일과 관련된 외교적 보장을 위한 독일의 경험들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 평화적인 관계, 통합 그리고 인접국들과의 화해 등은 미국과 같은 주요 동맹국들과의 확고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역사의 어려운 장을 청산하는 작업이 미래를 위한 정치를 해나가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것은 접근의 과정을 마무리하는 작업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Bernhard Seliger) /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번역 : 김영수 /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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