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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자연과 전통에 뿌리 둔 자유로운 시대정신, 재일한국인 건축미술가 이타미 준 2011년 9월호

포커스

자연과 전통에 뿌리 둔 자유로운 시대정신, 재일한국인 건축미술가 이타미 준

 

세계적인 건축미술가로 제주도에서 영어교육도시 건축 총괄을 맡고 있었던 재일한국인 ‘이타미 준’이 올해 6월 향년 74세로 도쿄에서 타계했다. 그의 유골은 한국으로 돌아와 선산이 있는 경남 거창에 모셔졌다.

그의 본명은 유동룡(庾東龍)이며 이타미 준은 예명이다. 대학 졸업 후 건축사무소를 내면서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庾)라고 하는 한자가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당시에 일반 인쇄소에 그 활자가 없어서 명함을 찍어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예명을 고안했다고 한다.

‘이타미’라는 성은 그가 첫 번째 해외여행에 나갈 때 이용한 오사카 공항의 이름에서 따왔고 ‘준’이라는 일본식 이름은 예술가적 브랜드에 맞을 것 같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말을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한국인 지인도 많고 말년까지 한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우리말을 듣고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래도 말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전통에서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이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전에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와 같이 모나지 않고 넉넉하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건축물을 구성해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백자 외에도 조선시대 민화를 비롯하여 벼루, 장, 상, 불상과 같은 골동품을 늘 곁에 두고 살았다.

“조선 백자처럼 넉넉한 건축하고 싶어”

그는 평생 국가와 민족의 틀에 갇히지 않고 자연과 삶이 어우러지는 보편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체온이 느껴지는 설계 도안으로서의 드로잉 작업에 충실하면서도 술, 두부, 죽, 재즈 등으로 일생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즐겼다. 지난 2003년 여름 프랑스 국립 기메 미술관은 이타미의 개인전을 열면서, 그에게 “현대 미술과 건축을 아우르는 작가, 국적을 초월하여 국제적인 건축 세계를 지닌 건축가”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는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생후 얼마 안 되어 온 가족과 함께 후지산이 가까이 보이는 시즈오카현 시미즈로 이사하여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일제 말기 양철 지붕의 간이 주택 같은 허름한 집에서 온 식구가 같이 살았고 해방 직후에는 집안에서 어른들이 밀주를 담그다가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시미즈는 대체로 보수적인 풍토가 강하기도 하여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에 주위의 차별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훗날 자신의 세계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64년에 무사시공업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미술학과가 아니라 건축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그림을 그려서는 가난을 면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반대가 크게 작용했고, 같은 지역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시코 준조가 건축학과 입학을 권유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설계사무소에 취업하려고 해도 쉽사리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희망하는 직장에는 자리가 거의 없는데다가 재일한국인 청년에게 일본사회는 너그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년 시절 취직을 기다리면서 아르바이트로 커피숍 설계를 하게 된 것이 오히려 훗날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되기도 했다.

1968년 31살이 되던 해 그는 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프로 건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그에게 건축설계를 의뢰한 사람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그가 데뷔작으로 설계한 ‘시미즈의 집’을 당대 유명한 사진작가 무라이 오사무가 촬영하였고 이로써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한편 그는 1968년 난생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자연 풍경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흙이 살아있는 한국의 민가에서 이타미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흠뻑 매료되었다.

시골 마을의 조용함에는 흙의 냄새가 그윽했고 멀리 뻗어있는 투명한 땅과 완만한 굴곡을 이루는 산기슭이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뿌옇게 주변의 산하에 녹아있었으며 사람들의 기척조차 없는 고요함에 넋을 잃게 되었다. 집이 들어설 곳의 자연 풍토와 전통 추억을 아우르는 지역성을 중시하는 그의 건축에 대한 평생 꿈이 이때 설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그는 한국과 일본, 프랑스 등을 무대로 하여 열정적인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1975년 도쿄 아오야마에 ‘Trunk’라는 건물을 지을 때에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해체되면서 나온 벽돌을 사용했다. 벽돌을 배에 실어 옮기면서까지 번거로운 작업을 강행한 것은 소재를 중시하는 현대미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같은 해에 완성한 자신의 아틀리에 ‘먹의 집’에서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공간에 조선 백자 몇 점과 조선시대 가구를 배열하여 명상에 깊이 잠길 수 있는 사랑채를 구성하기도 했다.

흙이 살아있는 한국 자연미에 매료

이타미의 작품 세계는 다음과 같은 그의 언어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온갖 시각적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현대건축에서 조형의 순수성을 획득하려면 작가는 그 토지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문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추출해야 하며 강인한 염원을 담은 조형 감각과 자유로운 시대정신을 겸비해야 한다.”

재일한국인으로서 그는 일본과 한국의 자연으로부터 작품의 모티브를 발견했다. 그는 일본에서 자연과 대화를 나누며 그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 건축을 배웠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을 비롯하여 자연과 문화의 중간 지점, 즉 중용을 철학으로 하는 사상과 멋이라는 말의 정신적인 깊이와 다양한 의미 등을 체득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과 한국에 무수한 작품을 남겨놓고 떠나갔다. 그 중에도 제주 핀크스 골프클럽의 클럽하우스와 게스트하우스 ‘포도 호텔’, 그리고 ‘두손 미술관’ 등은 제주도의 토착성과 지역적 소재를 활용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최영호 / 영산대 일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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