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1년 9월 1일 0

청소년에게 들려주는 이슈 | 김일성은 어떻게 정권을 장악했나? 2011년 9월호

청소년에게 들려주는 이슈 5

김일성은 어떻게 정권을 장악했나?

 

북한지역에서 명망있는 여러 민족지도자들을 제치고 어떻게 젊은 김일성이 느닷없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다. 이러한 연구들의 공통점은 1940년부터 해방시점까지 5년 간 소련군으로 활동했던 이력을 핵심적으로 보고 있다. 해방 초기부터 김일성이 다른 민족지도자들이나 공산주의자 보다 권력의 전면에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소련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 장교 출신으로 귀국

중국 길림의 육문중학에 다니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김일성은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직후 국민부 좌파 청년들과 함께 활동을 했다. 당시 ‘일국일당 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자, 만주일대의 한인 빨치산 조직들은 중국공산당에 대거 합류해 ‘동북항일연군’으로 편성되어 중국공산당과의 공동 항일전선을 펼치게 된다.

당시 19세의 김일성 역시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때 본명인 김성주 대신 ‘김일성’으로 개명하였다. 당시 김일성이란 이름이 유명해진 데에는 1937년 6월 4일에 일어난 보천보전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이후에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선전, 기념하면서 보천보전투를 부각시켜 왔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만주지역에 대한 일제의 토벌은 가혹해졌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1940년 소련의 하바로프스크로 이동하여 소련군에 입대, 특무공작요원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된다. 이후 그는 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 동안 복무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이 임박한 시기에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다. 조선공작단 일부는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한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참전하면서 입국했고, 나머지는 9월 원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6·25전쟁 과정에서 정적 모두 제거

1945년 9월 19일 다른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과 함께 원산항을 통해 귀국한 김일성은 22일 평양에 입성하였다. 이후 평양에서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조심스럽게 정치공작을 벌이던 김일성은 극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게 된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는 소련군정에 의해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스티코프 사령관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장인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나타났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의 정치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5년 10월 8일 김일성은 개성에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박헌영과 회담한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조직하고 10월 13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소련군정의 지원 아래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됨으로써 명실공히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등극하였다.

당시 부위원장에는 김두봉, 서기장에는 강양욱 등이 각각 선출되었다. 같은 날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가 되었으므로 그는 당을 장악하는 동시에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행정부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토지개혁과 산업시설 국유화 등 북한지역에 단독정권 수립을 위한 작업을 지속하였는데, 그동안 사용하던 태극기 대신 인공기를 제작,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를 반증한다.공산당 내에서 주도권을 잡은 김일성은 처음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인사들과 합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사회주의 진영의 세력을 확대하여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장악한 후 북한 전역에서 권력을 확보하였다. 1946년 3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됨으로써 분국이 아닌 독립적인 당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김일성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라이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6·25전쟁의 실패로 김일성은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오히려 이를 권력 장악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는 전쟁 실패의 원인을 부총리인 박헌영에게 전가하는 등 전쟁 실패의 책임을 다른 정치적 라이벌들에게 돌림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였다. 그는 1950년 10월 조만식을 처형하였고, 1952년에는 연안파의 무정, 그리고 1953년에는 소련파인 허가이를 제거하였다. 차례차례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한 김일성은 전쟁 막바지인 1953년 2월 인민군 창건 5주년 기념식에서 ‘김일성 원수’로 등극하였다.

이어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경애하는 수령’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김일성의 위상은 단순히 정치지도자가 아닌 숭배의 대상으로서 신적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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