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7년 9월 1일

박계리의 스케치 北 | 전쟁의 소용돌이 기억에서 멀어진 남자

print

박계리의 스케치 北 69

전쟁의 소용돌이 기억에서 멀어진 남자

티모데우스 앙가완 쿠스노, , 아카이빙, 영상, 사운드 설치, 2017

티모데우스 앙가완 쿠스노,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이야기>, 아카이빙, 영상, 사운드 설치, 2017

비가 억수같이 내리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개었다. 가을이 오는 향기가 느껴지는 뜨거운 날 아르코 미술관에 들러 <두 도시의 이야기 : 기억의 서사적 아카이브>(오선영 기획) 전시를 봤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라는 두 도시의 근현대사 전개의 유사함, 그 우연성과 필연성을 드러내어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호출하고 있었다.

전시의 시작은 “잠에서 깼을 때 공룡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기획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동안(1914~1945)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근대국가로 성장한다. 당시 일본은 전쟁 물자를 생산·보급하며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이로 인해 일본은 항복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었고 곧바로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전쟁(1945~1950),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1950~1953)이 일어났다. 이후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군사독재 정권, 산업화, 민주화 운동, IMF 경제위기와 같은 유사한 근대화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고, 이러한 기획자의 문제 의식에 인도네시아 미술가들이 화답하고 있었다.

티모데우스 앙가완 쿠스노의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양칠성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양칠성은 1919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1942년 일본군의 명령으로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반둥 포로수용소에 포로 감시원으로 배치되었다. 반둥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게릴라 집단은 다섯 명의 일본군을 포로로 생포했다. 그 중의 한 명이 시치세이 야나가와, 즉 양칠성이었다.

당초에 게릴라군은 포로들을 처형할 계획이었으나 코사시 소령의 반대로 와나라자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이송된 포로들은 게릴라군과 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포로들의 생각은 점점 바뀌었고,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를 원했다. 양칠성은 ‘코마루딘’이라는 무슬림식 이름으로 개명한다. 그리고 나서 양칠성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군사 침략한 시기(1947~1948) 에 인도네시아 군대에 입대하여 네덜란드와 싸웠다.

이후 양칠성은 게릴라군에도 합류하여 싸우다가 결국 네덜란드 군의 수배자 명단에 올랐고, 1948년 8월 적군 스파이의 밀고로 다른 게릴라군과 함께 도라 산맥에서 붙잡혔다. 그로 인해 게릴라군은 흩어지고 패배하게 된다. 양칠성은 처형되기 전에 이슬람 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러줄 것을 요청했고 하얀색 전통 상의와 붉은색 사롱을 입은 채 죽음을 맞았다. 언론인 요요 다스리오의 정보원에 따르면 총탄이 머리를 관통하기 직전에 양칠성은 해방을 의미하는 ‘메르데카’를 외쳤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보고르에 위치한 공설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75년 가루트의 텐졸라야 국립영웅묘지로 이장되었다.

3개 이름 가진 남자, 인도네시아 국립영웅묘지에 묻히다

양칠성, 시치세이 야나가와, 코마루딘이라는 3개의 이름을 갖고 살았던 이 남자의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휘몰아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일본과 인도네시아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경을 넘어야 했던 사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임없이 총을 들고 적군과 아군을 구분해야 했고, 이에 따라 총구를 겨누며 살아야 했던 그의 실존의 고민을 지금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한반도의 침략자 일본군에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인도네시아를 침략한 네덜란드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을까? 그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으며, 그가 갈망했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해방을 외치며 사라져간 그를 위해 인도네시아는 국립영웅묘지에 그를 품고 역사 위에 그의 이름을 기록했다.

인도네시아 작가 티모데우스 앙가완 쿠스노는 양칠성의 사진을 길거리 미술가들(길거리에서 여행자들을 상대로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버는 미술가들)에게 보여주고 그림을 받았다. 그 그림과 함께 양칠성의 이미지를 넣은 상품들을 만들어 좌판을 깔아 놓았다. 길거리 대중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좌판 위에 놓인 이미지 속의 양칠성은 인도네시아의 영웅이지만, 그 시대에 존재하였던 또 다른 평범한 누군가의 모습일 수도 있다. 내가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떠하였을까? 지금은 더욱더 그렇지만, 지난 전쟁도 우리만의 문제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국가와 국가가 얽히고, 그 사이에 평범한 인간들의 삶 역시 얽혀 무수한 이산과 혼종이 벌어졌다.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우리는 그 상처들을 감당 못한다는 듯 덮어버렸다. 무수한 기억들이 잊혔고, 그 사이 떠난 이들은 사라졌다.

다시 전쟁을 이야기할 용기가 있다면, 그 전에 차마 열어보지 못한 우리의 상처를 기억해내고 사라진 이들을 호출해낼 수 있는 용기가 먼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잠에서 깼을 때 공룡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박계리 / 미술사학자



댓글 0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 해야 합니다.

좋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