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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통일 이후 동독군,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다’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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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신뢰와 평화 남북, 군축의 발걸음 딛다

통일 이후 동독군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다

라이너 에펠만 / 전 동독 군축국방부 장관

지난 2014년 11월 9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장벽 붕괴 25주년 기념 축제 도중 독일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외벽에 '평화'를 의미하는 단어가 비치고 있다. ⓒ연합

 지난 2014년 11월 9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장벽 붕괴 25주년 기념 축제 도중 독일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외벽에 ‘평화’를 의미하는 단어가 비치고 있다. ⓒ연합

독일의 분단 시기 동독에서는 핵심을 이루는 권력기구인 사회주의통일당(SED)이 사회 전반을 매우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군대인 인민군(NVA)이 존재했다. 동독의 인민군은 권력의 핵심인 당, 즉 SED의 수족 역할을 한 기구라고 볼 수 있다.

동독 인민군은 과거 동유럽권의 사회주의 국가 군대 중에서는 가장 교육훈련이 잘 이뤄져 있고 장비 역시 양호한 상태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군사 문제와 관련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한은 종주국인 소련의 영향력 아래 위치하여 상당히 제한적인 측면이 있었다. 또한 전시를 비롯해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상황이 되면 50만명까지 병력 동원이 가능했지만 평시에는 약 17만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독군, 산업 현장 투입 등 사회적 조력자 역할 수행해

동독 인민군은 사회에 대한 ‘조력자’ 역할도 수행했다. 원래의 본분인 국방의 의무 이외에 경제 무대, 즉 산업 현장에 상시적으로 투입되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동독 인민군의 1만명 정도가 산업 현장에 투입되었고 필요 시 5만명 정도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현재 북한에서도 노동인력이 부족한 산업 현장에 군인들을 투입하여 공사를 하거나 농사를 지원하고 있는데 병력의 사회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한 특징적 행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 몇 가지 어떤 부정적인 영향이 발생하게 된다. 우선 군인의 본분, 즉 전투력의 유지 및 강화에 실패했다. 군에 대한 위신이나 권위를 인정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크게 추락했고 이는 군 복무에 대한 동기부여를 현저히 떨어뜨려 당시 의무병 제도를 실시한 동독 인민군의 정신적 무장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쳤다. 군 내부로부터 사기가 저하된 것도 물론이지만 198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급격하게 바뀐 대외적 환경도 큰 변수였다. 당시 상당수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위기를 맞기 시작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군 내부의 사기 저하와 절망감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정권을 향한 군부의 충성심에도 문제가 생겼다. 앞서 언급한 대내외적 악조건으로 이미 동독 인민군 내부에서는 상당한 절망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당시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번지게 되었다. 따라서 과거 천안문 시위 당시 중국 정권이 군부를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한 사례가 있었지만 동독에서는 이러한 메커니즘이 제대로 발휘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동독 인민군을 움직이는 주체는 사회주의통일당이었지만 군 내부에 상실감이 만연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정권이 군부에 영향력을 투사해 활용하는 방식은 생각만큼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실제로 동독에서는 1989년 주민들이 대거 시위에 나서 정권에 대한 반대를 행동으로 표출해내기 시작했는데 물론 당시 동독 정권은 인민군을 동원해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하려는 노력, 예를 들면 특수 목적을 가진 부대를 편성하고 운용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고 시위 현장에 대략 40회 정도를 투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무력진압을 통한 유혈사태 등이 발생하는 경우는 없었다. 동독 인민군은 주로 권력의 핵심기구인 국가보위부(슈타지) 등의 기관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위상변화 따른 군의 전환, 사회발전 맞춘 안정적 접근 긴요

이후 1989년 10월 9일 결정적으로 라이프치히에서 약 7만명의 대규모 군중이 모여 시위를 시작하고 이후에는 수만명 단위의 대규모 집회가 동독 대도시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퍼지게 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동독 인민군은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동독 정권도 매우 당황한 상태였고 동독 인민군 지도부도 더 이상 스스로 어떠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통일당의 통제력이 약화되기 시작하고 인민군은 급격하게 와해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어 1990년 3월 18일 동독의 최초이자 마지막 민주선거에 따라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고 목사 출신으로 동독 정권에 대한 반대 운동의 이력을 지닌 필자가 군축국방부 장관으로 인민군의 해체와 관련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공식 통일의 날인 10월 3일이 되면서 동독 인민군은 공식적으로 모두 해체되었다. 그 전에 상당수의 동독 인민군 소속 군인들은 자진하여 군문을 떠났고 심사를 거쳐 약 5만명이 남았다. 이후 2년여 시간 동안 다시 심사를 통해 약 1만1천명의 인민군 출신이 통일독일의 군대에 최종적으로 남아 활동했다.

당시 동독 인민군의 해체 작업을 주도하며 가장 어려웠고 조심스럽게 접근한 점은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드는’, 즉 무기를 쥐고 생계를 이어나간 사람들을 농업이나 기타 산업의 생활전선으로 전환하고 사회적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기회를 부여하는 작업이었다. 다행히도 동독의 마지막 군축국방부 장관으로 임하면서 단 한 건의 폭력이나 불미스러운 사건 없이 평화롭게 임무를 종결지을 수 있었지만 통일의 미래를 내다보며 본격적인 군축의 발걸음을 내딛는 지금의 한반도에 참고할 만한 점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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