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타임머신 | 동독 첫 자유선거 ‘3·18 총선’ “우리는 한민족이다!” 2014년 8월호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 | 독일통일 타임머신! 4
동독 첫 자유선거 ‘3·18 총선’ “우리는 한민족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은 통일을 향한 길을 열었다. 비록 세부적 조건은 상이하지만 분단이라는 상황 아래 한국과 독일은 다양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독일의 통일과정을 반추해 보는 것은 평화적 통일을 위한 한국의 여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통일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10대 사건을 되돌아 봄으로써 한국의 통일정책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본다(편집자주).
지난 1989년 12월 사회주의통일당(SED)이 결국 자신들의 통치 권한을 포기하게 되자 동독에서는 새로운 정당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의 범주에는 동독 시절 사회주의통일당과 함께 형식적으로 선거에 참가했던 소위 블록정당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신생 정당들은 민주적인 체제를 표방하였다. 자유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1990년 3월 18일 동독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가 된 인민회의 자유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중요한 변화들이 있었다. 1989년 12월 7일 처음으로 베를린에서 동독 사회의 평화적인 변화를 모색하기 위하여 시민운동 활동가들과 사회주의통일당 수뇌부가 만나는 소위 ‘중앙원탁회의’가 출범하였다. 원탁회의는 동독의 다른 여러 도시 및 행정관구들에서도 생겨났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대표적인 시민운동가들이 생각하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찾는 것이나 사회주의를 민주적으로 쇄신하는 방식 등은 거리로 쏟아진 시위대의 훨씬 더 급진적인 주장에 밀려 더 이상 동의를 얻지 못했다.
“우리가 인민”에서 “우리가 한민족”으로
매주 열렸던 대규모 시위에선 작지만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시위대가 처음 외쳤던 구호는 “우리가 인민이다.”였다. 시위대는 이 구호를 통해 ‘노동자를 위한 첨병’으로서 인민을 대표한다는 사회주의통일당의 주장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한민족이다.”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시위대는 통일을 원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외국에서 들려오는 우려의 목소리를 감안하여 공식적으로는 통일을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동독의 깃발인데, 사회주의의 상징인 망치와 콤파스를 지운 검정-빨강-노란색의 독일 전통 삼색기(서독 국기)가 등장한 것이다. 그 당시에 시위대가 얼마나 통일을 갈망했는가 하는 것은 1989년 12월 19일 당시 헬무트 콜 서독 연방 총리가 드레스덴을 처음으로 방문하였을 때 잘 나타났다. 당시 수천명의 시위대 환영 인파가 독일의 전통 삼색기와 녹색-하얀색의 작센 전통 깃발을 들고 콜 총리를 맞이하였다.
이듬해 1월이 되자 서독의 기민당 정치인들은 동서독의 화폐 및 경제 통합을 요구하고 나섰다. 40년 동안 사회주의통일당의 충실한 블록 정당 역할을 해왔으며 단지 종교 분야에서만 사회주의통일당과 약간의 차이를 보여 왔던 동독의 기민당은 1월 말에 기민당 소속 장관들을 내각에서 사퇴시켰다. 동독 기민당은 시민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민주개시당 및 독일 사회연합당과 함께 독일의 신속한 통일을 옹호하는 주요 대변자로 떠올랐으며, 이 세 정당들은 동독 인민회의 선거를 앞두고 마침내 ‘독일연합(Allianz fr Deutschland)’으로 합당하였다.

동독 인민회의 선거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자유선거인 3·18 총선에 사용되었던 투표용지. 베를린 제1선거구에서 사용되었던 24개의 정당이 표시된 것이다.(출처 : Wikimedia Commons)
독일연합이 선거에서 어떤 성과를 거둘지는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 정당인 민주사회주의당(민사당, PDS)은 계속해서 해체를 염려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베르가초프’라는 별칭으로 고르바초프와 같은 개혁사회주의자로서 명성과 인기를 얻은 베르크호퍼 드레스덴 시장이 민사당을 탈당하였다. 베르크호퍼 시장은 1989년 12월에 민사당 부총재가 되었지만, 그는 당의 개혁 능력에 의구심을 제기하였다. 민사당은 다음과 같은 사회적인 재앙을 암시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독일이 통일되면 연금 생활자들은 더 이상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며, 이전의 ‘융커(지주계층)’들이 다시 출현하여 농민들을 추방하고 동독은 서독의 식민지가 될 것이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신설된 사민당(SPD)의 역할이었다. 동독의 사민당은 평화혁명 초기에는 SPD가 아니라 SDP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였으며, 통일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SPD로 개명하였다. 사민당은 동독 최초의 인민회의 자유선거에서 승리하리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근거로는 첫째, 사민당은 1933년 이전인, 즉 나치와 공산주의 시절 이전에 공업이 발전했던 중부 독일 및 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던 작센 주의 츠비카우 시나 켐닛츠 시를 비롯하여 베를린 등에서 치른 선거에서 언제나 다수당을 차지해 왔다는 점이 꼽혔다. 둘째로는 동독 사민당은 의식적으로 사회주의통일당과 일정 거리를 두고 창당을 했기 때문에 소위 ‘철새 정치인’ 논의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었다. 세 번째 근거는 서독 연방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서베를린의 시장을 지낸 바 있는 빌리 브란트를 영입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빌리 브란트는 동독에서 큰 인기를 누렸으며, 그 인기는 그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행한 발언 이후에 더욱 높아졌다.
한편 환경운동이라는 공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동독의 시민운동가들 중 일부는 ‘동맹 90(Bndnis 90)’을 결성하여 서독의 녹색당과 행보를 함께 하였으며, 이들 중 다수는 제3의 길을 희망하였다. 이들은 시위를 통해 독일 통일은 1945년 이전으로의 후퇴를 의미한다고 경고하였다. 인민회의 선거를 앞두고 여행 자유화 법안이 공포되었고(1990년 2월 1일), 며칠 후에는 원탁회의 소속 정당과 그룹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국민책임정부’와 슈타지 해체를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동독 독일연합 탄생 … ‘신속한 통일’ 대변자로 급부상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한 블록 정당들에게 선거전은 커다란 도전과제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선거전을 치르는 방식을 처음으로 습득해야 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민사당의 돈과 조직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민당은 특히 400회가 넘는 행사를 통해 80여 명의 고위 정치인들을 초대하여 서독 정치인들이 지닌 지명도와 인기를 활용하였다. 특히 헬무트 콜과 함께 한 대규모 집회에는 수십만명에 이르는 청중들이 참석하였다. 에르푸르트시 집회에 15만명, 켐닛츠시 집회에 20만명 등 여러 동독 도시들에서 열린 집회에 수십만명이 참가하였다.
헬무트 콜 총리는 1989년 12월 초에 있었던 집회에서 연방제를 위한 10개 안을 조심스럽게 발표한 바 있었는데 불과 두 달 여가 지난 시점에는 신속한 화폐 및 경제 통합 방안과 통일을 촉구하고 나섰다. 동독의 해체 현상이 명확해졌던 것이다. 1990년 3월 18일의 선거결과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선거전을 진행하면서 헬무트 콜 서독 연방 총리가 동독의 여러 도시들을 순회하며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민당이 이끌었던 독일연합이 4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과반수 의석에 조금 모자라는 대성공을 거둔 선거결과는 아무도 예측을 하지 못하였다.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사민당은 기민당의 거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참패를 하였다. 사민당도 빌리 브란트나 오스카 라퐁텐과 같은 인기있는 서독 정치인들을 선거전에 투입하였으며, 자민당은 인기있는 서독 외무장관인 한스-디트리히 겐셔가 많은 애를 썼지만 대부분의 동독 유권자들은 신속한 통일만이 동독의 비관적인 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3·18 총선, 독일연합의 대성공과 사민당의 참패
선거 결과는 불과 선거 사흘 전에 독일연합 진영에서 명백한 스캔들이 발생했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독일연합을 구성했던 3개의 파트너들 중 하나였던 민주개시당 총재였던 볼프강 슈누어가 인민회의 선거를 앞둔 수일 전에 서독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의해 슈타지의 비공식 정보원이었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사민당은 분노했다. 얄궂게도 총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독 사민당의 총재였던 이브라힘 뵈메 또한 슈타지 요원이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실조차 선거 결과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던 빠른 통일을 향한 열망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다.
동독 기민당의 새로운 총재인 로타 드 메지에르는 1990년 4월 12일에 선거 결과에 따라 독일연합(기민당, 독일 사회연합당, 민주개시당)과 사민당, 그리고 자민당을 아우르는 대연정 내각을 구성한다. 이렇게 구성된 대연정 내각은 폭넓은 다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독일통일을 위한 중요한 준비단계에 있어서의 입법 활동을 수행하는 등 필요한 작업들을 합의하에 수행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새로운 내각의 부대변인을 맡은 사람은 앙겔라 메르켈이었는데, 그 때에는 젊고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이었지만 지금은 독일 연방총리로서 독일과 유럽에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여성이 되었다.
새로운 내각의 가장 중요했던 과제는 신속하고 광범위한 통일 준비를 통한 스스로에 대한 정리 작업이었다. 그렇게 새로 선출된 인민회의와 새로 구성된 내각은 약 6개월 남짓 과제를 수행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에 동독과 독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이 작업을 수행하는 동안 서독 정부가 늘 옆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서독 정부는 3·18 총선 이전인 1990년 2월 7일에 이미 내각 차원의 ‘독일통일 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3·18 총선에서 독일연합이 4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반면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사민당은 참패를 하였다. 대부분의 동독 유권자들은 신속한 통일만이 동독의 비관적인 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Bernhard Seliger) /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번역 : 김영수 /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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