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타임머신! | 동서독, 통일조약 서명 … 통일독일 탄생하다 2014년 11월호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 | 독일통일 타임머신! 7
동서독, 통일조약 서명 … 통일독일 탄생하다
1990년 2월에 이미 서독의 콜 총리는 미하엘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으로부터 독일통일에 대한 일반적인 동의를 얻어 냈으며, 한 달 뒤인 3월에 실시되었던 동독 총선은 통일을 향한 동독인들의 의지를 나타내는 확실한 신호였다. 그 이후에 경제, 화폐 및 사회통합이 결정되었지만 독일의 통일 과정은 정체국면을 맞게 된다.
우선 통일 방식과 관련하여 개헌을 통한 방식이 되어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연방주를 만들어서 가입하는 방식을 선택해야 할지 정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며, 연방주를 신설하는 방식도 시간이 필요했다. 서독의 모델에 기초하여 가능한 신속하고 완전한 통일을 원하던, 기민당이 이끌던 ‘독일을 위한 연합(Allianz fr Deutschland)’과 더 작은 규모의 ‘사민당’ 그리고 향후 존속문제를 걱정하던 ‘자민당’으로 이루어진 대연정 내에서 긴장관계가 지속되었다.
1990년 6월 17일 동독에서는 처음으로 1953년 6월 17일에 있었던 동독 시민들의 반 정권 항거일을 기념하면서 ‘독일을 위한 연합’에 속해 있던 보수 정당이었던 독일 사회 연합당(DSU)은 서독 기본법 제23조에 의거한 즉각적인 통일작업을 요구하는 논의를 위한 안건을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이 안건은 처음에는 연기되었는데, 로타 드 매지에르 당시 동독 총리가 독일통일을 위한 내부 및 특히 외교적인 여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해당 안건은 우선 동독 인민회의의 해당 위원회들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 무렵에 동독의 경제상황이 극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1990년 7월과 8월 불과 두 달 사이에 산업생산이 50% 이상 감소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생긴 결정적인 원인은 활력을 잃은 소련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블록 겸 동독의 거의 모든 수출 대상국들이 속해 있던 상호경제지원위원회(RGW)의 붕괴와 화폐통합이었다. 새로 지정한 환율로 인해 이전 동독 마르크화가 가파르게 평가절상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는데, 동독인들의 서독행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경제권 붕괴와 화폐통합, 동독 경제 악화시켜
동독 지역의 와해 상황을 막기 위하여 로타 드 매지에르 총리는 조속한 전체 독일 지역에서의 총선을 제안하였으며, 이는 당초에 계획했던 1990년 12월 이전인 1990년 10월에 구 동독 지역들이 통일독일에 가입한 직후에 총선과 함께 주 선거도 함께 치르자는 제안이었다. 사민당은 이 제안을 거절하였으며, 로타 드 매지에르 총리는 1990년 8월 13일에 바로 4명의 장관을 경질하였는데, 사민당 소속의 발터 롬베르크 재무부 장관과 사민당이 추천했던 또 한 명의 장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정치적인 갈등이 고조되었다. 경제, 화폐 및 사회통합 조약의 이행과 관련하여 사민당 소속 장관들의 업무 진행이 드 매지에르 총리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이러한 결과 나머지 사민당 소속 장관들도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이렇게 되자 선거법에 관한 이견으로 인해 그 이전에 이미 자민당은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에 동독에는 여소야대의 정국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90년 8월 22일에 서독으로의 가입 여부를 결정하는 동독 인민회의 본회의가 열리자 밤새 진행된 회동에서 몇 차례의 실패 끝에 이전에 대연정에 참가했던 정당들이 공산당 후신 정당인 민사당(PDS)과 녹색당의 의견에 반대하여 서독에 가입하는 방안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1990년 8월 31일, 동서독 간 ‘독일 통일조약’ 서명
이어서 서독과의 협상이 진행되었는데, 서독 측에서는 쇼이블레 내무부 장관이 협상 대표를 맡았으며, 동독 측에서는 귄터 크라우제 총리실 정무차관이 협상 대표로 나섰다. 1990년 8월 31일에 양측 협상대표들은 베를린 운터 덴 린덴가에 있는 옛 황태자 궁전에서 ‘독일 국가 통일 완수에 관한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일사천리로 통일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이 조약은 1990년 9월 20일에 동독과 서독 의회에서 각각 찬성 299표, 반대 80표, 기권 1표 그리고 찬성 442표, 반대 47표, 기권 3표로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의결되었다.
자유선거에 의해 선출된 동독 인민회의 구성원의 2/3 이상이 통일독일에 가입하는 데 찬성표를 던진 결정을 통해서 우리는 가끔씩 제기되는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었다는 주장의 불합리성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기본법 제23조에 입각하여 선택한 통일방식은 성공적인 서독의 경제 및 사회 체제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바람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신속한 가입과 동시에 최상의 법적인 안정성 그리고 풍족한 물질적 기반을 갖추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이는 이전 사회주의 체제로부터 전환한 여타 국가들이 수년이 지난 후에도 달성하지 못했던 성과였다. 또한 신연방주들이 통일독일에 가입한 시점은 소련이 존속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입에 따른 외교적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보장되는 상황이었다.
기본법 제23조에 따른 가입(신연방주들의 개별 가입) 이외에 중요한 규정들로는 동독의 자산 및 부채를 통일독일이 승계한다는 것이었다. 베를린은 통일과 더불어 법률을 통해 하나의 주가 된 동시에 통일독일의 수도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1991년 6월 20일이 되어서야 격론을 거친 후에 연방의회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연방 정부를 베를린으로 이전하는 것이 결정이 되었으며, 실질적인 이전 작업은 1998년부터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통일조약의 부록 1장에는 연방공화국(서독)의 법규가 극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입 지역에서 즉시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동독의 민법이나 가족법과 같은 법률들은 즉시 효력을 상실하였다. 개별적인 규정들은 주 차원에서 존속하였다. 통일조약에서 미해결인 채로 남았던 낙태에 대한 처벌 문제는 수년 동안 정치적인 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4대 전승국 동의 있어야 국내정치 현안 이행 가능

독일민주공화국의 독일연방공화국 가입에 관한 통일조약 서명식은 운터 덴 린덴가에 있는 옛 프로이센의 황태자 궁전에서 거행되었다. 서명식 이후에 악수하는 주요 인사들로 왼쪽부터 볼프강 쇼이블레 서독 내무부 장관, 로타 드 매지에르 동독 총리, 귄터 크라우제 동독 정무차관이다. (출처 : Creative Commons License)
독일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항상 시급하고 주요한 과제였던 경제시스템 개선 내지 국내 정치 현안 이외에도 통일과 관련하여 외교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당연히 달성해야 하는 필수과제였다. 이러한 과제의 해결을 위해서 통일조약은 독일통일을 위해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기본법 조항을 변경하였는데, 요약하면 ‘독일의 동쪽 인접국들은 1937년 당시의 독일 국경선을 기준으로 한 이전 독일의 동쪽 영토에 대한 가입 시도가 있을 것이란 우려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호는 중동부 유럽에서 새롭게 민주주의로 변모하고 있는 이전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독일 및 베를린에 대해 여전히 특별 권한을 지니고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4대 전승국들의 동의가 있어야만 국내 정치 현안 또한 이행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관해선 다음 호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Bernhard Seliger) /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번역 : 김영수 /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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