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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리의 스케치北 | 조규봉, 피 끓는 모성의 절절함 빚다 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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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리의 스케치北 35 | 조규봉, 피 끓는 모성의 절절함 빚다

북한의 미술 수업시간에 인체 데생(dessin)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석고. 북한 사람들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북한의 미술 수업시간에 인체 데생(dessin)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석고. 북한 사람들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분단 이전 우리 미술계에서 조각가의 숫자는 회화 장르에 비해 상당히 빈약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전통시대 서화만을 예술로 인정하고 조각가들을 ‘장인’, ‘쟁이’로 여겼던 산물일 수도 있고, 당대 환경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이 그러하였으니 평양화단은 더욱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북한 조각계는 사실적인 구상조각을 다루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누가 이들을 교육해 냈을까? 생각해볼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이름이 바로 조규봉이다.

1917년 인천에서 출생한 조규봉은 19살 되던 해인 1936년 미술가가 되겠다는 푸른 꿈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7년 동경미술학교의 조각과에 입학하였다.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여 미술계에 등단한 이래로 계속 출품하여 수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문전에도 출품하여 입선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44년 부모가 있던 중국 동북 창춘시로 와서 창작생활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최초의 조각가 단체인 ‘조선조각협회’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1946년 8월 인천시립예술관 개관기념미술전에 출품한 뒤 바로 월북하게 된다. 북한 측 기록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강원도 해방탑 건설준비위원회가 해방탑 건설과 관련하여 조규봉을 초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북조선미술가동맹 조각분과위원장의 책임을 맡으면서 1946년 말 모란봉에 세우는 해방탑 제작에 참여하는 등 그는 북으로 오자마자 창작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1949년 9월 평양미술대학이 창립되면서 조각학부 교수가 되어 이후 40여 년간 평양미술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실질적으로 북한의 조각계를 이끄는 조각가들을 교육해 왔다.

<남녘땅의 어머니> … 굳건한 어깨, 마디마디 굵은 어머니 손

, 조규봉, 1959년, 높이 93㎝,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남녘땅의 어머니>, 조규봉, 1959년, 높이 93㎝,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1959년 제작된 <남녘땅의 어머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으로 당선되기도 한 작품이다. 허기진 아이를 가슴에 안은 피 끓는 모성의 절절함이 강인하게 전달되어 오는 작품이다. 가녀린 아이의 가냘픈 어깨와 대조되는 편안하고 넓은 손. 여윈 아이의 어깨로부터 등까지 감싸 안은 마디마디 굵은 어머니의 손은 모성애가 무엇인가 보여주고 있다.

여리고 가냘픈 여성의 몸매가 아닌, 모진 풍파를 든든하게 막아내고 있는 굳건한 가슴과 강인한 어깨의 어머니. 그 몸 구석구석의 촉각적 터치에서 묻어 나오는 삶의 무게를 견뎌 온 흔적들. 어린 자식을 바라보는 눈빛에 머금고 있는 처절한 절망과 조심스런, 그러나 옹골진 용기가 전달되어 온다.

이와 같이 조규봉 조각의 특징은 대상의 심리 상태를 표현해 낼 수 있는 예리한 표현력과 터치를 통한 촉감적 표현, 세부를 선택하여 중점적으로 묘사하는 것 등이다. 또한 <남녘땅의 어머니>에서 보듯이 특히 흙을 다루는 것에 뛰어났다.

북한 조각계에서 조규봉이 차지하는 역할은 단순히 그가 좋은 조각 작품을 남겼다는 데에 머무는 것은 아닌 듯하다. 북한 조각사에서 대기념비 조각 창작이 시대적 과제로 제시되었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그는 지도적 위치에서 대기념비 제작 사업에 참가하여 <천리마동상> 창작에 참여하였고, <보천보전투 승리기념탑>의 초안을 설계하였으며, <만수대기념비>, <왕재산대기념비> 등 대기념비 창작 사업에 참가하였다.

대기념비 미술에 대한 선례가 없던 북한에서 이 사업을 책임지고 건립해 내는 중심에 조규봉이 있었으니 북한에서 그의 위치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는 ‘나무조각기초’ 등 교육을 위한 참고도서들을 많이 집필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식 교육 실정에 맞는 석고상 교재도 창작하여 실기교육에 사용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북한 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 당국도 이를 인정하여 그가 70세 고령이 훨씬 지날 때까지 조각실기 교수뿐만 아니라 조선미술사, 외국미술사, 인체조형 해부학을 비롯한 전공 이론강의를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러한 월북한 1세대 조각가들의 노력 속에서 북한의 조각계가 성장했다는 사실은 분단이라는 끝나지 않은 역사의 아이러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박계리 / 한국전통문화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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