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4년 12월 1일 0

박계리의 스케치北 | 김일성을 그린 여자, 정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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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리의 스케치北 36 | 김일성을 그린 여자, 정온녀
 
 
정온녀

정온녀

한상익

한상익

 “정온녀는 오직 창작에만 몰두하면서 자기의 개인 생활에 관심을 돌리지 못하였다. 물론 자기 일신상 문제에 대하여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자신도 마음의 동요가 있었으나 뜻대로 되지 못했다. 한 때 짐을 꾸려가지고 행여나 하여 한상익을 찾아 원산으로 갔었으나 한상익 자체도 여성보다 그림을 더 사랑했던지라 사이좋게 이해하고 헤어지고 말았다.”(『조선력대미술가편람』, 1999)
 
 북한의 공식 미술가 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이 글 때문에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남한에서, 정온녀는 미술가 이전에 한상익의 연인으로 더 많이 회자되는 것 같다. 공식 미술가 사전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매우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같은 책에 수록되어 있는 한상익에 대한 서술에는 정온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 또한 위 문구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게 하는 것 같다.
 
 남녀 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어찌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발생하는 뜨거움일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면, 사람 사는 동네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사람 냄새 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공식적인 사전에 개인적인 로맨스가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일까? 솔직히 아직도 그 답을 풀어내진 못했다.
 
신여성 정온녀과 한상익 사이엔 무슨 일이?
 
 한상익은 지난번 연재를 통해 작품을 소개한 바와 같이 기운 생동하는 작품의 힘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작가였기 때문에 그의 주변을 맴돌았던 정온녀에 더 많은 관심이 발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미인대회에 나가서 1등 없는 2등으로 당선되었다는 이력도 한몫 했던 것 같다.
 
 1920년생인 정온녀는 남한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 박래현과 동갑이다. 박래현은 작품도 훌륭하지만, 청각장애인이었던 화가 김기창과 결혼하여 헬렌 켈러의 설리번 선생처럼 김기창의 귀가 되어 주었던 아내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박래현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 화가로 익히 유명한 나혜석 또한 동경여자미술학교 출신이다. 나혜석, 박래현이 그러하듯 정온녀 또한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신여성임에 틀림없다.

, 정온녀

<정물>, 정온녀

 정온녀는 도쿄 유학 당시 화단을 휩쓸고 있던 인상주의화풍이 아닌, 일본의 나까자와 히로미츠의 사실주의 화풍에 매료된다. 그녀의 탄탄한 인체 데생은 이미 유학 시기부터 체득되어 갔다. 이러한 실력은 1951년부터 내각사무국 전속미술가로 재직하면서 최고사령부에서 김일성 주석을 가까이 관찰하며 그의 초상화를 창작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 최고사령부의 회의실, 응접실, 각 사무국의 부서에 걸린 김일성 주석의 초상이 그녀의 작품으로 확인되고 있다.

, 한상익

<총석정>, 한상익

 물론 이 시기에도 그녀는 풍경화 또한 다수 제작했는데, 풍경화와 정물화의 양식은 한상익의 작품들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극한다. 기운이 생동하는 붓터치와 마띠에르의 효과, 색의 조화들에서 이러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단단한 인물화의 덩어리감과 달리 흩어지는 정물화의 생동감은 그녀가 작품의 대상과 주제에 따라 양식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창작활동을 해나갔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남북한을 통합한 20세기 미술가 사전을 서술한다고 해도 단연 그녀는 대표적인 미술가로서 역사에 남을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1994년 국제문화회관에서 개인전이 열렸다는 것으로 보면 북한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그녀의 위상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는데, 1999년 발행된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그녀에 대한 서술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정온녀는 지금도 독신으로 장자강 기슭의 경치 좋은 화실에서 깊은 추억을 안고 조국통일의 그날을 그리며 창작의 붓을 놓지 않고 있다.”
 
 왜 한상익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20세기의 자유연애의 바람은 사회를 매우 뜨겁게 달궜다.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20세기의 자유연애가 뜨거웠던 것은, 일부일처제의 확립과 함께 공존해야 했기 때문인 듯하다. 남성들이 정실 외에 첩을 두고 사는 것이 익숙했던 문화에서 첩이 용인되지 못함과 동시에 불어 닥친 자유연애의 바람은 청춘들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던 듯하다.
 
 그래서 한상익은 남쪽에 남편과 딸을 두고 온 정온녀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기구한 20세기를 살아야 했던 신여성의 삶. 그 가슴에서 쏟아진 단편들이 먹먹하게 전달된다.
 
 
박계리 / 한국전통문화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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