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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 존재조차 비밀이었던 한 남자의 특별한 이야기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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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 <나의 독재자>
존재조차 비밀이었던 한 남자의 특별한 이야기

1972년, 남북 간에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이다. 라디오와 TV에서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통해 7개항의 남북공동성명이 전문과 함께 발표됐다.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남북 당국 간 움직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국민들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이미 1972년 5월 2일부터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김영주 등과 회담하면서 남북공동성명과 정상회담 등을 조율했고 북한에서는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만났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72년은 남북한이 각각 유신체제와 유일지도체제를 발표 또는 완성한 해다. 현재 입장에서 당시의 두 지도자를 ‘독재자’로 비판할 수 있는 구실이 만들어진 해였다.

‘짝퉁 수령동지’의 트라우마 극복기

닭다리를 서로 양보하는 성근의 가족들

닭다리를 서로 양보하는 성근의 가족들

영화 <나의 독재자>는 바로 그러한 시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1972년에 최초로 남북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이에 따른 남북 접촉이 시작되면서 실제로 추진되었다고 알려진 정상회담 준비용 김일성 대역배우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심소재다.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은 정부에서 한 명의 무명 배우를 발탁하고 김일성의 대역으로 교육시키면서부터다. 하지만 당시 정상회담은 불발에 그치면서 한 무명배우의 삶에도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리고 세월은 훌쩍 흘러 20여 년 후의 시대로 넘어간다. 1972년 당시의 무명배우 아빠와 아들은 어느덧 할아버지와 다단계 사업가로 변했다.

독재자의 대역이 되기 위해 머리를 다듬는 성근

독재자의 대역이 되기 위해 머리를 다듬는 성근

영화의 제목인 <나의 독재자>는 아들인 태식(박해일)의 입장에서 본 아버지 성근(설경구)을 일컫는 말이다. 벌써 어감에서부터 두 부자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않을 것이란 냄새가 풍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예고편이나 선전 문구를 보면 자칫 코믹물로 오해할 소지가 있지만 영화 <나의 독재자>는 그렇게 가벼운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남북정상회담, 부자 간 갈등, 한 무명배우의 트라우마라는 세 가지 프레임이 얽혀 있다. 1972년과 1994년 두 시기의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소재가 사용되었다. 이 두 시기를 관통하는 인물이 소극장 출신의 무명배우 성근이다.

영화 선전 문구에는 무명배우 성근을 ‘짝퉁 수령동지’라 코믹한 호칭을 붙이고 있으나 성근이 점차 김일성에 동화되어 가는 장면은 처절하고 섬찟하다. 어찌보면 인생의 끝에 몰린 성근에게 ‘김일성 대역’은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과 같았다. 그리고 성근에게 성근과 김일성이라는 두 개의 자아가 공존하면서 부자 간 갈등이 깊어진다.

서로 등 돌리고 앉아 있는 성근과 태식

서로 등 돌리고 앉아 있는 성근과 태식

이 영화는 큰 틀에서 성근과 태식이 엮어가는 2인 드라마의 느낌이다. 물론 오계장(윤제문), 여정(류혜정) 등 다른 등장인물들이 있지만 극의 흐름상 성근과 태식이라는 부자관계가 1972년에서 1994년 공간으로의 변화과정에서 만들어내는 갈등이 이야기가 중심구조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이야기의 흐름에서 대체하거나 빼도 될 정도로 존재감이 거의 없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 태식(박해일)과 여자친구인 여정(류혜정) 간 정사장면이 극의 전개상 반드시 필요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물론 아쉽게도(?) 화끈한 정사신은 아니다. 알듯말듯하게 처리됐다. 이 장면으로 인해 영화 <나의 독재자>는 ‘15세 이상’이라는 연령제한에 묶이면서 가족영화로 다가가는 데 실패했다.

초등학생을 포함한 가족끼리 관람할 수 있게 연령제한이 없었다면 영화관람 이후 부모와 자식 간에 과거 1972년과 1994년 대한민국 공간에서 발생한 다양한 현상에 대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버지의 가슴 먹먹한 부성애

주인공인 성근이 연극배우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트라우마는 1994년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로부터 다시 한 번 호출을 받으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부름을 받은 성근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청와대를 향한다. 그리고 성근은 김일성으로 빙의된 듯 남북대화와 ‘핵’문제를 놓고 대통령과 대본에 없는 설전을 펼친다. 그로 인해 정상회담 예행연습은 중단되지만 성근의 대사는 계속된다. 마치 김일성이 접신된 양 사자후를 토해내는 성근.

영화 <나의 독재자>의 주 갈등요소는 전통적인 부자갈등과 무명배우 트라우마다. 그 가운데 양념으로 들어간 것이 남북 분단상황에서의 ‘김일성 대역’이라는 시대적 요소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설경구의 연기력에 너무 의존했다는 인상을 준다. 플롯의 구도에서 나오는 긴장감은 다소 약하다. 다만 마지막 성근의 한이 묻어나는 ‘리어왕’ 대사는 한 편의 오페라를 연상시키는 비장한 느낌으로 다가와 가슴을 찡하게 한다.

서유석 / 북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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