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 국가보훈이 선진국격의 척도다 2015년 6월호
국가보훈이 선진국격의 척도다
올해 6월은 광복 70주년 분단 70년에 맞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가슴이 한층 더 찡하고 뭉클해짐을 느낀다. 70여 년의 고난과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호국영령의 희생 위에 값진 자유와 번영을 이루었다는 뿌듯한 감격이 북받쳐 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격심한 갈등과 분열, 아직도 대립하고 있는 남북분단 상황을 바라볼 때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 앞에 이내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주지하다시피 광복 이후 한동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국토분단에 이어 6·25 전쟁을 겪고 첨예한 남북 대립을 겪으면서도 짧은 기간에 국제사회가 경탄해마지 않을 눈부신 경제발전,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으며, 그 바탕 위에서 정치적 민주화까지 훌륭하게 달성해 낸 모범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70년 동안 북한이 ‘동굴’에 갇혀버린 역사를 써내려 왔다면, 대한민국은 ‘터널’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물신주의 매몰된 대립과 갈등, 사회공동체 의식 약화시켜
이처럼 대한민국이 선진국 문턱에 다가와 있지만, 어느 때부턴가 도처에 만연하기 시작한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그 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우리 사회 내부는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 분열의 골이 깊게 패이고 만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할 정치권의 직무유기가 주원인이겠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급속히 밀어닥친 산업화 과정에서 싹튼 물신주의에 매몰된 탓일 것이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물질로 인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를 소홀히 취급하게 된 것이 사회 혼란의 주범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우리 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며, 국가안보에 필수적인 국민통합을 크게 저해하는 근본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동서고금의 세계문명사를 통해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대체로 외부의 적보다 우선하여 내부요인이 망국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아무리 물리력이 강한 나라라고 할지라도 지도자와 국민이 정신적으로 나태해졌을 때 국운이 쇠하게 되고 결국은 패망하고 마는 것이다. 이미 플라톤은 철인(philosopher)이어야 할 국가 지도자들이 대중영합적인 궤변론자(sophist)가 되고 그리하여 국민이 갈팡질팡하게 될 때 나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는 사실을 간파하였고, 그 예측은 아테네의 패망으로 그대로 입증되었다. 우리의 경우 예민한 지정학적 위치에다 호전적인 북한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내부마저도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다면 어떻게 안보를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한 나라가 계속 존속하기 위해서는 국방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물리력, 즉 하드파워(hard power)의 증강이 필수적이지만, 정신력이나 문화력과 같은 소프트파워(soft power)의 확보도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 하는 점을 역사는 잘 일깨워주고 있다.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선진강국들이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결합을 뜻하는 스마트파워(smart power) 강화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소프트파워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국력 증진을 위해 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포인트임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하드파워는 물질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확보가 제한적인 반면에 소프트파워는 개발 여지가 크게 열려 있어 스마트파워를 키우는 데 있어 중요한 전략적 요소로 삼아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국력 증진을 위한 도구로서 귀중한 정신적 자산인 국가보훈의 가치를 특별히 중시할 필요가 있다. 국가보훈은 나라사랑 정신을 앙양하며 국가정체성을 함양하는 핵심적인 기제 중의 하나로서 국민통합에 크게 기여하고, 나아가 국가의 내적 안보 능력을 제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원주의 시대 속에서 국민 모두가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생활환경이지만, 국민 개개인이 평소 나라에 대한 자긍심과 확고한 국가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다면 이는 국가발전과 국가안보의 큰 자산이 될 것이다.
보훈선양 통한 국가정체성 강화, 국민통합 견인해
흔히들 서구 선진국들은 곧 보훈 선진국이라고 말한다. 주된 이유로는 이들 나라가 물질적으로 풍요하다는 점에서 보훈 가족들에게 물질적으로 충분히 보상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보훈 정책에 있어서 보훈선양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보훈선양은 ‘기억의 정치’ 차원에서 국민통합을 위한 귀중한 상징정책에 해당한다. 사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에서 보훈선양 정책만큼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잘 묶어주는 기제는 드물다. 이 정책은 호국보훈 인물의 국가공동체를 위한 숭고한 희생정신을 강조함으로써 일반국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는 데 있어서 더없이 좋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국민, 영토, 주권만 있으면 국가가 형성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제대로 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르낭(Ernest Renan)이 “국가는 영혼으로 존재한다.”라고 강조했듯 국가를 움직이는 영혼, 곧 ‘나라사랑 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선전선동에 능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나라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에 바탕한 확고한 국가정체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국가정체성으로 국민통합이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튼튼한 내적 안보만 구축한다면, 북한의 어떠한 대남 공작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고, 자신 있게 북한의 변화를 견인하며 평화통일로 가는 길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보훈 선진국으로 거듭나야 하는 근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일환 / 보훈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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