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타임머신! 9 | 콜, 통일총리로! … 최초 통일내각, 동독출신 기용 2015년 1월호
통일독일 첫 총선
콜, 통일총리로! … 최초 통일내각, 동독 출신 기용
새로 설립된 다섯 개의 연방주들이 1990년 10월 3일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함으로써 독일의 국가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통일독일의 의회 선출 및 조각(組閣)이라는 마지막 작업이 남아있었다. 1990년 3월에 실시되었던 인민회의 선거를 통해 새로운 동독 정부가 탄생하였으며, 이 정부를 통해 폭넓은 변화에 관한 협상을 진행하였고 신연방주들을 구성하여 독일통일을 완성하였다.
이후 진행된 1990년 12월 총선은 통일에 대한 통일독일의 첫 번째 국민투표였다. 동독주민들은 같은 해 초에 개최되었던 대규모 집회에서 헬무트 콜 총리에게 환호를 보냈지만 그들과 서독주민들이 정작 총선에서는 어떤 결정을 할지 의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총선은 헬무트 콜 총리에 관한 국민투표 성격이기도 했다.
지지자들에게 콜 총리는 ‘통일 총리’인 동시에 스스로가 칭한 바와 같이 ‘역사의 외투’를 움켜쥐고 유리한 시간을 십분 활용했던 인물이었다. 실제로 1991년이 되자 소련은 미하엘 고르바초프의 정책에 반대하기 시작하였으며, 독일 통일은 조금만 늦었어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콜 총리에 반대하는, 특히 좌편향 성향의 언론 중심에서는 콜 총리를 ‘조야한 지방 정치인’이라고 폄하했으며 통일을 주장한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비난하였다. 이들은 이전까지 수십 년간 통일에 대해 ‘복수를 꿈꾸는 자들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1982년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던 시점에 13년 동안 사회-자유 연정을 구성하였던 자민당(FDP)이 경제정책 분야의 차이로 인해 사민당(SPD)이 이끌던 정권을 떠나 기민당(CDU)과의 연정을 이룬 이후 헬무트 콜 총리는 1983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콜 총리에 대한 반대 의견은 기민당 내에서도 존재하였다. 콜 총리는 1970년대에 얻었던 50%에 가까운 지지율을 얻지 못하고 있었으며 1988년에 있었던 전당대회(동독에서의 시위가 시작되기 이전 시점)에서는 당내 반대자들에게 거의 권력기반을 내줄 뻔한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사민당은 콜의 정치적 약점과 <슈피겔>이나 <슈테른>과 같은 좌파 성향의 언론들이 퍼붓는 악의적인 공격에 따른 별다른 실질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콜 대항마 사민당 라퐁탠 “통일 비용 경고자 되겠다”
1990년 12월 총선에서 콜 총리의 대항마였던 오스카 라퐁탠은 서독의 작은 주인 자르란트 주의 젊은 총리로서 사민당의 떠오르는 대표 정치인들 중 한 명이었는데, 독일의 분단 시절에 잘츠기터 동독 인권침해사례 기록 활동을 냉전의 유산으로 보고 반대하는 사민당 정치인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며, 통일을 낡고 위험한 민족주의로의 회귀로 생각하는 동시에 동독 공산주의 정당인 사회주의 통일당과 눈높이를 맞춰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하였던 정치인이었다.
한스-요헨 포겔 당시 사민당 원내대표와 요하네스 라우 당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서독 연방주들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주) 총리가 1983년과 1987년 총선에서 각각 헬무트 콜 총리에게 패배한 이후에 사민당 내 좌파 계열의 대표 주자로서 라퐁탠은 사민당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당원들의 희망을 바탕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90년 총선에서 헬무트 콜 총리에 대항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는데, 사민당은 통일이라는 의제와 관련하여 완전히 기습을 당해서 동독 마지막 인민의회 선거에서 자신들의 바람과는 달리 완전히 기가 꺾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라퐁탠은 자신이 헬무트 콜 총리가 침묵하고 있는 통일 비용에 관한 경고자로서의 역할을 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사민당은 완전히 이중전략을 구사하였다. 서독에서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사민당 소속 사회부 장관이었던 하이네만이 이미 1990년 초부터 ‘서독인들을 위한 일자리 우선정책’을 주장하면서 동독으로부터의 제한 없는 이주에 반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서독 마르크화를 동독에 그렇게 신속하게 도입하였던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동독주민들의 소득을 향상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신연방주에 머무르도록 유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반면 동독 지역에서 라퐁탠은 시장경제가 동독 지역의 산업을 망가뜨릴 것이며, 서독에 반대하는 의미를 내포한 전형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며 주민들이 가진 걱정들을 두둔하였다. 서독 마르크화의 신속한 도입은 동독의 모든 산업이 실질적으로 하루 아침에 경쟁력을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왜냐하면 서독 마르크화의 도입을 통한 내재된 화폐가치의 증가와 엄청난 폭의 물가 상승이 서독 시장에는 판매가 불가능한 상품들에 대해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불과 두 달 만인 1990년 7월과 8월에 동독 지역의 산업생산은 절반 이하로 감소하였으며, 이는 고용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많은 동독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특히 40대에서 50대 사이의 세대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이 ‘통일의 패자들’은 처음부터 시작하기에는 나이가 많았으며, 자신들이 쌓아온 인생의 업적이 새로운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 그 가치를 상실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발생했던 사회적인 불안감은 그러나 여론의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커다란 급변사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경제적 문제들의 진정한 뿌리가 새로 도입된 시장경제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실패한 경제 때문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독 경제를 다시 정상화시켜야 하는 커다란 과제에 관한 윤곽이 드러나면서 동서독 양쪽 지역에서 모두 초반의 열광하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어느 정도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12월 총선, 헬무트 콜과 기민당/기사당 연합 압승
특히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사회주의 통일당의 후신 정당이었던 민사당(PDS)이 거둔 결과였다. 재능과 카리스마를 갖춘 그레고어 귀지가 이끌던 민사당은 커다란 지지율 감소를 감내해야 하기는 하였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살아남는데 성공하였으며, 지속적으로 특히 신연방주에서 사민당에 대한 좌익 계열의 대안으로서 자리를 잡아 나갔다. 민사당은 특히 여당인 사민당이 경제 문제와 관련하여 양보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실시되는 연방 내지는 주 차원의 선거들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민사당과 그 후신 정당인 좌익당은 오늘날까지도 내각에 참여하는 기회를 갖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좌익당은 통일을 이룬 지 25년이 되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주도적인 세력을 이루고 있지는 못하며 구동독 지역에서 약 20%의 지지를 받고 있고 구서독 지역에서는 5% 정도 또는 그 미만의 득표를 하고 있다. 이는 중동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있어서의 공산당 후신 정당들(심지어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국가들에서 조차 강한 공산주의 활동이 전개되는 것을 감안하면)이 빠른 시간 내에 재부상하는 현상과 비교하면 매우 온건한 변화를 보이는 상황이며, 통일 이후의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협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 통일독일 첫 내각에 기용돼
총선 결과는 헬무트 콜 총리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의 큰 승리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계속해서 자민당(FDP)과 연정을 하여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통일독일의 첫 번째 연방총리가 되고자 했던 헬무트 콜의 꿈이 실현되었다. 헬무트 콜 총리는 처음부터 내각에 동독 출신 장관들을 기용하였다. 이렇게 새로 기용된 동독 출신 장관들 중에는 젊은 여성 장관이 있었는데, 초반에 이 여성 장관은 어리고 정치무대에서의 경험이 없다며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독일과 유럽,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여성이 될 사람이었으니, 바로 앙겔라 메르켈이었다.
당시에 앙겔라 메르켈의 부상(浮上)은 전혀 예상치 못하는 상황이었으며, 또한 예를 들면 클라우디아 놀테와 같은 다른 동독 출신 정치인들은 실제로 혹독한 서독의 자유언론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초기부터 동독 출신 정치인들을 중용한 것은 미래를 향한 매우 중요하면서도 현명한 투자였다. 이는 동서독 양측의 상호 이해 및 공동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한국의 상황에서 다가오는 통일 직후에 북한 출신 인사들이 중요한 정치적 위치에 오르고 그 이후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서 국가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북한 출신이 차지한다는 상상을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헬무트 콜 정부는 1998년까지 유지되었으며 이로써 헬무트 콜은 독일의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기간 중간인 1993년에 독일은 유럽의 대규모 경기불황을 경험하였으며, 구동독 지역에서는 30%에 육박하는 실업률을 기록함으로써 독일 전체의 실업률은 12%에 달했다. 산업 경쟁력은 갈수록 나빠지는 등 1990년대 말이 되자 독일은 ‘유럽의 병자’ 취급을 받게 되었다. 성장동력은 고갈되었으며 부채는 높아져만 갔다. 독일이 경쟁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광범위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헬무트 콜 총리가 1998년에 온건한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시도하다가 정권을 잃은 이후에 들어섰던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이 더욱 근본적인 고용시장, 사회보장제도 및 연금보험제도의 개혁을 실시하면서 당내 분열이 생기고 7년 후에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당 측에 정권을 넘겨주게 된 점은 이율배반적인 측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총선 결과는 헬무트 콜 총리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의 큰 승리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계속해서 자민당(FDP)과 연정을 하여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통일독일의 첫 번째 연방총리가 되고자 했던 헬무트 콜의 꿈이 실현되었다.
헬무트 콜 총리는 처음부터 내각의 장관직에 동독 출신들을 기용하였다. 동독 출신 정치인들을 중용한 것은 미래를 향한 매우 중요하면서도 현명한 투자였다. 이는 동서독 양측의 상호 이해 및 공동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Bernhard Seliger) /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번역 : 김영수 /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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