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1월 1일

2014 통일독일 현장연수 |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동서독을 오갔다 2015년 1월호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동서독을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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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동서독을 오갔다. 내가 있는 곳은 독일, 베를린이었지, 더 이상 어느 곳의 베를린이 아니었다. 장벽이 허물어진 자리에는 도로가 지나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선을 넘었다. 독일통일 25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내 가슴 속의 벅참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그들에게 통일은 이미 일상이었다.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12월, 연수단은 베를린에서 ‘통일독일 현장연수’의 첫 발을 뗐다. 베를린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베를린의 주요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나폴레옹이 승리의 징표로 가져갔었다는 콰드리가(사두마차), 프로이센의 독일통일 상징인 전승기념탑 등 과거의 문화가 도시를 수놓고 있었고, 1961년 베를린을 가로질러 세워진 장벽과 사회주의의 건축양식을 반영한 잿빛건물 등 근현대의 기억도 간직하고 있었다.

도시 외관만이 아니었다. 정부 차원에서 설립한 연방정치교육원, 독일연방 구사회주의 통일당 독재청산재단 등은 분단의 아픔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이 기관들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민주주의를 알리고, 과거 나치와 동독 독재에 대한 청산작업 및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작업들은 잔인한 독일 역사 속에 남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것으로 과거를 청산하면서도 동시에 잊지 말아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가해진 행위보다 피해당한 상처가 더 큰 법이었기에 이러한 자발적 시민교육을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독일의 의지가 느껴졌다.

이어 자유를 찾아 떠나온 동독이탈주민들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구동독이탈주민 임시수용소를 방문했다. 임시수용소는 탈동독인들이 서독에서 정착하기 전 일종의 신원조사를 하는 곳으로 이곳에 들어선 우리는 자연스레 북한이탈주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1953년부터 1989년까지 36년간 이곳을 거쳐 간 사람이 135만명. 독일에는 탈동독인들을 위한 특별한 지원 시스템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들이 서독인들과 같은 사회 일원으로서 권리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서독 사회보장 시스템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한민국에 정착한 2만 7천여 명의 북한이탈주민들이 사회적 약자로 구분되어 있는 우리 사회와는 다른 상황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동서독인을 구분 짓지 않는 사회적 인식, 체제에 대한 서독의 자신감, 특별한 유인책 없이도 자유를 향한 동독인들의 열망이 빚어낸 결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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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을 흐르는 개천 하나로 동서독이 된 뫼들라로이트. 당시 마을을 가로지르던 장벽이 100m 가량 남아있다.

드레스덴, 첨단산업도시로 변모 … 성공적 통일모델

많은 것을 느끼게 한 베를린을 뒤로 하고 드레스덴으로 향하는 아우토반. 잘 닦인 도로는 동독 재건에 집중적인 투자가 있었음이 역력해 보였다. 이른 새벽 짐을 한 가득 실은 트럭들도 종종 눈에 띄어서인지 물류도 활발해 보였다. 그렇게 들어선 드레스덴은 유럽의 건축양식을 반영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도시 곳곳에서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드레스덴은 작년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이어서 괜시리 친숙하게 느껴졌다.

연수단이 방문한 드레스덴 시청 경제진흥청의 디르크 힐베르트 경제 부시장은 드레스덴을 마음껏 자랑했다. 전통적으로 공업 기반이 강했던 드레스덴은 통일 이후 전자, 기계, 생명공학(BT), 나노기술(NT) 등의 첨단산업이 발달한 곳으로 변모했으며 폭스바겐, AMD 등의 세계적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경제성장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기존 53만명의 드레스덴의 인구가 분단 후 47만명까지 줄어들었지만 현재는 54만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정부도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경제+교육+문화의 삼박자가 어우러져 드레스덴이라는 하모니를 만들어내도록 했다. 통일 당시 공식 실업률이 20%, 재교육을 받는 인원까지 감안한다면 실질 실업률이 50%에 달했다는데 현재는 5%대의 꾸준한 경제성장률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과연 드레스덴은 통일의 성공적 모델이 될 만했다. 그렇다면 통일 후 북한의 드레스덴이 될 수 있는 곳은 어딜까. 화학공업이 발달한 함흥? 유통이 용이한 평성? 남북협력 공단이 있는 개성? 북한이 가지고 있는 인프라를 바탕으로 몇 군데를 대입해 보았다. 하지만 페터 노트나겔 작센주 경제개발공사 상무이사의 발언은 뜻밖이었다. “북한에서 독일과 같은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북한의 공장을 방문해보니 과거 동독의 상황보다 훨씬 열악했다. 독일인들이 갖고 있던 장인정신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루아침에 통일이 되면 위험하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북한의 산업을 재건하고 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술이 보존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새로운 기술을 계속 투입하여 산업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다. 남과 북의 교류를 이어가야 했다. 지금부터 투자하는 것이 차후 들어갈 비용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길이겠지만 우리 앞에 닥친 장애물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드레스덴 프라우엔(성모) 교회 앞 노이마르크트 광장. 프라우엔 교회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85% 가까이 잿더미가 됐지만 통일 이후 영국, 미국 등의 모금으로 재건되어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 드레스덴 프라우엔(성모) 교회 앞 노이마르크트 광장. 프라우엔 교회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85% 가까이 잿더미가 됐지만 통일 이후 영국, 미국 등의 모금으로 재건되어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비용은 신경 쓰지 마라, 통일에 따른 만족이 더 크다”

연수 내내 독일인은 하나 같이 이야기했다. “비용은 신경 쓰지 마라, 통일에 따른 만족이 더 크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통일 논의는 이미 경제적 손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독일의 사례를 봐버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독일통일의 카타르시스에서는 점차 비명이 새어나왔고, 마냥 부러움에 가득 찼던 우리의 시선은 한반도 통일에 대한 우려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성장의 정점을 찍은 한국경제에서 통일은 가능한 지체되길 바라는 이벤트가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특히 통일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무관심은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취업, 결혼, 육아 등 눈앞에 닥친 현실만 생각해도 지쳐 가는데 통일은 사치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수잔네 루터 한스자이델재단 국제교류협력원장은 “통일에 대한 열망과 의식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서독의 젊은이들도 자신의 관심사가 훨씬 중요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의 통일은 적절한 시기에 왔다. 그 시점이 아니었다면 동서독 통일도 더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통일된 지금이 훨씬 낫다며 한국에서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통일이 이뤄져야함을 당부했다. 한국도 독일처럼 하루아침에 통일이란 기회의 창이 열린다면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준비가 안됐으니 외면하고 문을 닫은 채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그날을 하염없이 기다릴 것인가. 결국 우리의 선택은 준비밖에 없다. 통일을 미뤄야하는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닌, 기회가 닥쳤을 때 잡을 수 있도록 통일준비는 현재진행형의 일상이 돼야 한다.

일정이 마지막으로 치닫는 지점, 우리는 ‘리틀 베를린’이라 불리는 뫼들라로이트 국경에 서있었다. 이곳은 작은 마을에 그어진 국경선으로 인해 주민들이 직접적으로 분단을 겪은 곳이었다. 마을 공동체가 한 순간 다른 곳이 되며 같은 마을의 형과 동생이 이산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마을에 세워진 철조망, 지뢰, 자동발사장치는 삶을 비극으로 갈라놓았다. 80m 떨어져 있는 형과 동생은 80km를 돌아가야 만날 수 있었다. 통일이 된 지금, 주민 수 48명의 작은 마을은 예전과 같은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행정적으로 뫼들라로이트 남쪽은 바이에른주, 북쪽은 튀링엔주로 여전히 나뉘어져 있어 분단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었다. 뫼들라로이트는 남북한의 강원도 고성군을 떠올리게 했다.

독일연방 구사회주의 통일당 독재청산재단에서의 기념촬영

▲ 독일연방 구사회주의 통일당 독재청산재단에서의 기념촬영

독일, 끊임없는 교류 통해 공감의 끈 이어가

독일의 분단과 통일은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독일은 전쟁을 겪지 않았다. 서로를 미워할 결정적인 사건이 없었다. 남북분단 70년이 흐른 지금,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직접 당하지 않은 세대가 늘어가고 있지만 지금도 남북 간에는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고 있어 젊은 세대에도 소모적인 감정의 벽은 쌓여왔다. 시간이 흐르며 감정의 벽도 점점 높아지는 것만 같다. 이 벽을 어떻게 허물어야 하나.

우리와는 다른 양상으로 통일을 이룬 독일이었지만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 있었다. 교류였다. 사람이 오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40년간 떨어져 있던 사회는 일상에서 문화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감의 끈을 이어갔던 것이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분명했다. 우리 또한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교류를 이어가는 것이 견고해진 감정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열쇠였다.

전쟁의 폐해를 딛고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이전 세대는 전에 없던 부흥이라는 영광과 분단이라는 숙제를 우리 세대에 함께 넘겨줬다. 우리는 이전 세대로부터 받은 두 가지 유산을 활용해 한국만의 통일모형을 만들어야 한다.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교류의 폭을 넓히고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다. 우리 세대는 또 다시 다음 세대에 분단이란 유산을 남겨줄 수 없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한국도 독일처럼 하루아침에 통일이란 기회의 창이 열린다면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결국 우리의 선택은 준비밖에 없다. 통일을 미뤄야하는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닌, 기회가 닥쳤을 때 잡을 수 있도록 통일준비는 현재진행형의 일상이 돼야 한다.

전쟁의 폐해를 딛고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이전세대는 전에 없던 부흥이라는 영광과 분단이라는 숙제를 우리 세대에 함께 넘겨줬다. 우리는 이전 세대로부터 받은 두 가지 유산을 활용해 한국만의 통일모형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하르트무트 코쉬크 독일 연방의원

“북한은 사춘기 소년 … 큰 형이 보듬어야”

▲ 독일통일의 외교정책 경험을 공유하기 위한 ‘한·독 통일외교정책자문위원회’가 지난 10월 31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렸다.

▲ 독일통일의 외교정책 경험을 공유하기 위한 ‘한·독 통일외교정책자문위원회’가 지난 10월 31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렸다.

지난 12월 2일 베를린 한 식당에서 연수단은 하르트무트 코쉬크 독일 기독교사회당 연방의원과 자리를 가졌다. 독일의 대표적 지한파로 알려진 코쉬크 의원은 7선의 중진으로 독·한의원친선협회 회장이자, 한·독 통일외교자문회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특히 지난 10월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북관계에 대한 의견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개성공단은 남북 만남의 장”

그는 무엇보다 남북이 함께 일하는 개성공단의 가치를 높이 사고 있었다. “개성공단을 방문해 보니 북한의 다른 공장에 비해 현대적 기술 기반을 갖고 있었으며, 훨씬 깨끗하고 배식·의료 서비스도 좋았다. 그야말로 북한 근로자들이 인간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하는 환경이다.” 이는 개성공단의 근로자들이 북한 시스템에서는 접할 수 없는 것들로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질수록 파급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즉 개성공단에서 생산하는 경제적 가치 외에도 정치적 의미에 주목하고 있었다. “개성공단을 방문할 때 평양의 관료도 함께 했다. 그 평양 관료도 개성공단을 처음 방문한 것이었는데,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다. 평양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대적 시설이 갖춰져 있었고, 현장 분위기에 역동성이 있었던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북측 근로자와 남측 관리인이 같이 일하는 모습에서 누가 북한사람인지, 남한사람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라는 일화를 소개해주었다. 또한 “북한사람들에게 동기부여가 주어진다면 남한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개성공단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남북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점”을 꼽았다. 즉 남북 간 교류가 지속되어야 하며 이러한 공간이 확대될 필요가 있음을 의미했다.

또한 북한에 투자하려는 독일기업이 있다면 다른 곳보다 우선 개성을 추천하고 싶다며 “개성공단에서 생산하는 물건이 다른 아시아 생산품에 비해 질이 좋은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한반도의 대치상황으로 과거 공단폐쇄 같은 이야기가 다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는 비단 독일기업뿐만 아니라 한국기업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라며 투자가 확대되기 위해서는 안정성이 필요함을 설명했다.

코쉬크 의원은 자신이 바라보는 남북관계를 형제에 빗대어 설명했다. “북한은 사춘기 소년과도 같아 불안함과 갈등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사춘기를 지난 큰형으로 경제적 자립도 했다. 큰 형이 동생보다 경험도 많으니 동생에게 좀 더 관대할 필요가 있다.”며 남북관계의 접근을 정치가 아닌 ‘심리’의 문제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통한 지한파 의원답게 2002년 월드컵을 예로 들었다. “한국팀의 4강 진출을 이끈 것은 히딩크 감독의 심리적 접근에 있었다. 선수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강요가 아닌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4강 진출을 따낸 것은 결국 한국 선수들의 힘이었다.”라며 필드 위의 선수들, 즉 남북 당사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역설했다.

“北 경제특구, 미얀마식 개혁개방 참고해야”

한편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조심스레 진단을 했다. “지난 10월 방북 당시, 북한은 현대화되고 있다는 점을 알리려 노력했다. 다만 현대화의 성과를 당과 군부가 아닌, 김정은에 연결시켜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김정은이 당과 군부 사이에서 최소한 자체적인 권력을 갖고 있다고 봤다.”라며 김정은 체제가 일정 수준 안착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북한 권부는 지금의 체제가 깨지지 않고 유지되길 원하겠지만 북한 경제 여건상 지속될 수 없다. 한 순간 무너지거나 단계적으로 접근할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래도 김정은은 뭔가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라고 변화를 예측했다. “북한이 발표한 13개 경제특구를 활성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독일에 조언을 공식요청한 바 있다. 북한이 폐쇄적 시스템과 독재체제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미얀마의 개혁개방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며 북한의 변화에 대해 미얀마 모델이 가장 적절하다고 평가했다.

코쉬크 의원은 “분단을 겪은 독일사람들은 한국사람들에게 같은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 독일과 한국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독의 경제관계는 계속 성장하고 있으며 한-EU FTA를 정점으로 이 관계는 더 활기를 띨 것이다. 한국의 통일 기회도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믿는다. 한국이 자체적인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할 텐데 그 길을 찾는 데에 독일이 도움이 되고 싶다.”며 한국의 통일 과정에 독일의 협력을 약속했다.

“한국의 통일 기회도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믿는다. 한국이 자체적인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할 텐데 그 길을 찾는 데에 독일이 도움이 되고 싶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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