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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인물 | 이탁, 전구서 2015년 10월호

이달의 인물

이탁, 의(義)와 담(膽)으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탁(李鐸, 1889. 3. 18.~5. 17.) 선생을 2015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평남 평원 출신으로 1908년 평양 대성학교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지도를 받던 중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1913년 만주 유하현 소재 일신학교 교장이 되었다. 1914년 신흥무관학교 경영에도 참여하였고 1919년 매국 7적 응징을 목적으로 27결사대를 조직하여 서울로 잠입하여 격문을 배포하였다.

1919년에는 만주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다.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표로 임시정부에 파견되었으며 서간도지역 임시정부의 군사기구인 광복군총사령부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임시정부 동삼성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7월 미국 의원단 내한 때 안경신 선생을 비롯한 3개 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평남도청을 폭파하는 등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1921년 상해에서 한중국민호조사를 조직하여 문서과 부주임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무간사로 선임되었고, 시사책진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2년 2월 상해 대한적십자사 감사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국민대표주비회가 조직되자 서기로 임명되어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해 재정분과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과 3부 통합운동에 참여하였고 1927년 농민호조사 발기에도 합류하였다. 1929년 상해에서 한인학생의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같은 해 4월 국내로 잠입하여 평양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펼쳤다. 12월에는 임시의정원 만주·간도지방 대표로 선임되었다.

도산 선생이 의(義)와 담(膽)을 가진 인물로 극찬할 정도로 선생은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을 다하다 1930년 상해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10월 중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10월 한 달간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을 담은 사진을 전시할 계획이다.

 전구서, 하늘의 눈이 되어 조국을 지키다

1950년 8월 포항과 영천지구에 대한 적군의 공세가 강화되는 가운데 L-4 정찰비행부대 조종사로서 제2군단에 파견된 전구서 이등상사는 8월 24일 정찰작전을 수행하던 중 포항 서북쪽의 기계 방면으로 침입하는 적 지상군 2개 대대를 발견하고 UN 공군의 F-51 전투기를 유도해 적을 전멸시켰다. 9월에는 영천 일대 공중정찰을 실시하다가 남쪽 1km 지점에서 2개 연대 규모의 적 이동병력을 발견, 아군의 즉각 대응 작전으로 적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10월 7일 그는 중부전선을 따라 북진하던 제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화천지역 상공에서 관측비행을 수행 중이었다. 화천 상공에 진입하자 적의 대공포화가 집중되었지만 그는 적진을 저공비행하며 아군의 포격이 적에 명중되도록 관측을 계속했다. 소총으로도 피격이 가능할 만큼 속력이 느리고 기체도 보잘것없는 L-4기로 저공비행을 시도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군단의 눈’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책임완수를 최상의 명예로 삼았던 그는 끝내 정찰기와 함께 불꽃 속에 장렬히 산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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