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10월 1일

통통 인터뷰 | 땀이 송글송글, 꿈이 송이송이 영글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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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 인터뷰 | 김주영 포도농장 경영인

땀이 송글송글, 꿈이 송이송이 영글어가요

김주영 포도농장 경영인

전북 김제시 백구마을.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일조량, 통풍이 잘 되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어 전북일대에서는 당도 높은 백구포도가 유명하다. 백구포도의 기원은 인접해 있는 농원마을로 올라간다. 농원마을은 마을 주민 90% 이상이 1·4후퇴 때 피난 온 실향민이었다. 그들은 야산을 개간해 포도, 복숭아, 고추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했다. 그러던 것이 일대에 퍼져갔고 김제를 유명 포도산지로 만들었다. 백구마을도 그중 하나이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들어서자 달달한 포도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주민들은 수확철을 맞아 한창 포도를 따고 포장하느라 분주했다. 그 가운데 포도만큼 탐스러운 밝은 미소를 밝히는 이가 있다. 평안남도 북창군에서 온 김주영 씨. 북에서 와 일명 평양댁으로도 불린다고 하는 그는 귀농해 포도농장을 운영하는 새내기 농사꾼이다.

나는 엄마다. 내가 조금 힘들면 아이들이 더 행복할 수 있다

그가 고향을 떠나온 건 2008년 초봄이었다. 아직 강은 녹지 않고 차가운 물만큼 두려움이 앞섰지만 그는 중국행을 결심했다.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내 새끼들이 굶는다.’ 잠시도 망설일 수가 없었다. 국경경비대원들이 잠시 한 눈을 파는 순간, 눈을 질끈 감고 강 건너로 뛰기 시작했다. 고향에 있는 자식들에게 보내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렇게 보낸 돈은 북한의 화폐개혁으로 휴지조각이 되기도 하고, 수차례 사기꾼에게 떼이기도 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는 북한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 다시 한국행을 결심했다. 기회의 땅이 선물할 미래에 가슴이 부풀었다.

한국에 오는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무엇하나 막히는 게 없었다. 3개월의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거주지역 정하던 날, 무작위 추첨으로 이뤄지는 거주지역 배정에서 원생 대부분이 수도권으로 배정받길 바랐다. 하지만 지역이 한정되어 있는 탓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고 추첨 결과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가 뽑은 새로운 보금자리는 김포였다. 모두가 부러워했다. 그 역시 김포에서 시작될 나날이 기대됐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몰랐다. 행운의 여신이 비극까지 가져다 줄은….

마음이 조급했다. 그만큼 의욕도 앞섰다. 앞으로 살아갈 곳에 하루빨리 부딪히고 싶었다. 이곳은 자본주의 사회였다. 식당, 배달, 주방용품 조립 등 할 수 있는 일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쉬지 않고 6개월을 일하다 보니 점점 지쳐감을 느꼈다. 하지만 한국은 참 신기한 곳이었다. 일해도 월급을 주지 않는 북한과 달리 한국에서는 하루를 나가 일하면 그만큼의 돈이 들어왔다. 적은 돈일수도 있지만, 쌀 20kg을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이 양이면 북에서 두 달을 지낼 수 있었다. 더구나 아직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조금 힘들면 아이들이 더 행복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다시금 일터로 향하게 했다. 반복되는 노동에 자신의 몸이 축나는지도 몰랐다.

그날은 자동차 철판 가공 공장으로 향했다. 자동차 부품을 프레스로 찍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날만은 나가지 말아야 했다. 이를 악물고 일하던 도중,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는 응급실로 실려갔다. 의료진들은 분주히 그의 손을 수술하고 붕대를 감아뒀다. 그는 차마 손을 쳐다볼 수 없었다. 수술 후 며칠이 지나 궁금한 마음에 용기를 내어 왼손을 훔쳐보기로 했다. 손바닥에는 엄지 손가락만 남아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무리 험한 세상에 살아도 몸만은 온전했는데. 이렇게 되려고 온 게 아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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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 딛고 새내기 농사꾼으로!

희망의 땅에서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곁에 힘이 되어준 건 두 아이와 하나센터 직원이었다. 몇날 며칠을 찾아와 위로해주고 아픔을 함께 나눠주었다. 하지만 정작 공장에서는 전화 한통 없었다. ‘내가 북한에서 왔다고 이러는 건가.’ 주변의 도움으로 소송까지 갔지만 네 손가락은 보상받을 수 없었다. 서러움이 밀려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멍하니 집에 들어앉아 넋이 나간 채 술에 의지해 살았다. 그토록 바라던 지역이었지만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일어서기로 마음먹었다. ‘난 엄마다. 자식들을 위해 정신 차리자. 엄마로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익산으로 터를 옮겼다. 마음을 가다듬고 전국장애인센터, 취업알선센터에 닥치는대로 등록했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그에게 세상은 쉽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계속되는 고배에 지쳐갈 때쯤 하나센터 직원이 귀농을 권유했다. 귀농해서 성공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하지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북에서 힘들게 농사짓는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이 손으로 궂은 농사일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앞섰다. 그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귀농하여 포도농장을 운영한 지 갓 1년 된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교육을 받으며 처음부터 포도를 알아갔다. 본격적인 농사에 앞서 겨울이면 전지를 하며 가지를 다듬었다. 가지 자르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순이 나왔다. 열매가 달릴 순만 잘 자랄 수 있도록 계속 순을 자르고, 밑거름과 비료를 주고, 물을 주면 가지가 커져갔다. 가지가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묶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새 알이 생기고, 알을 솎아주고, 봉지로 싸주고 나면 봉지 안에는 잘 자란 포도가 그의 노력을 증명해주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땀이 가져다 준 열매의 기쁨은 기대보다 달았다. 이렇게 거둔 포도는 전북, 익산 일대로 유통됐다. 일부는 즙을 내어 다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딩동’하고 포도를 주문하는 휴대전화 알림이 울렸다.

제가 행복함을 느끼니 성공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는 자신이 맛 본 즐거움을 주변에서도 함께하길 바랐다. 그의 순수한 바람과 달리 귀농 의식이 낮은 북한이탈주민들은 쉽사리 동참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포도농사 한다고? 네가 이런 일을 할 줄 몰랐다.”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농사를 힘으로만 한다고 생각해 천대하는 경향이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인식 탓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농사는 북한과는 천지차이였다. 대부분의 공정이 기계로 움직였다. 단순히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수확만 하는 게 아니었다. 부지런함과 동시에 틈틈이 공부도 해야 했다.

그는 하루하루 바쁘게 생활하지만 오히려 귀농을 하며 여유가 생겼다고 말한다. “농사는 내가 한 만큼 얻을 수 있어요. 더구나 다른 사람 눈치보지 않고 일해서 그런지 스트레스도 없죠.” 쉬는 날이면 종종 따뜻함을 나눠주었던 하나센터에 들러 집 앞에서 심은 채소를 나눈다. 내가 거둔 채소를 주변사람들, 동향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됐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만약 그날의 사건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김주영 씨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여전히 도시 속 쳇바퀴를 돌리고 있을 터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끌려 온 낯선 이곳도 실향민들이 앞서 터를 다졌던 그곳이다. 또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귀농은 그에게 진정한 꿈과 기회를 선사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는 김주영 씨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얻은 것을 더 나누고 싶어 가까운 미래에 포도농장을 확대하고 강연을 다닐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아직 성공이라고 말하기는 이르지만 제가 행복함을 느끼니 성공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고향을 떠나온 아픔, 장애가 가져온 설움은 어느새 가슴 한 켠으로 멀어져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땀이 송글송글, 꿈이 송이송이 영글어간다.

선수현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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