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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 김세호 할아버지 “이건 당해본 사람 아니면 몰라” 2013년 8월호

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7

김세호 할아버지 “이건 당해본 사람 아니면 몰라”

TS_201308_62기다림도 내성이 생기나보다. 최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간 제안이 오갔지만, 김세호 할아버지(77)는 기대도 실망도 없었다. 60년을 넘게 기다리다보니 이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 들어가야지, 1주일이면 끝나겠지’ 했는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63년이 지났다.

“60년 이리도 잠깐인데 … 동족은 먹여 살려야지”

이렇게 더운 여름날이면 유독 고향이 생각난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남도 용강군, 메밀국수가 유명한 곳이다. “우리 고향은 메밀이 많이 나고 냉면이 맛있지. 무명옷도 유명해. 우리 가족은 다른 지역에 옷을 팔고 생선 등을 사오고는 했어.” 할아버지는 현재 서울 일대의 유명한 북한 냉면들은 동향 사람들이 고향의 방식으로 만든다고 자랑을 늘어놓으며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할아버지의 인생에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모두 담겨 있었다. 10살이 되던 해,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그때는 어려서 해방이 뭔지 몰랐다. 15살이 되던 해, 조국은 전쟁을 시작했다. 여전히 어렸지만 전쟁의 의미는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 7남매는 남과 북으로 헤어졌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집을 떠나 부모, 동생들과 헤어져 큰형과 누님의 손에 이끌려 기약 없는 피난길에 올랐다. 1주일이 꼬박 걸려 도착한 부산 피난민 수용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먹밥 하나와 소금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다시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가리라는 희망으로 버텼다. 이러한 생활이 길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던 할아버지는 서울에 계신 친척집으로 다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서울 이모부는 따뜻하게 맞아주실 틈도 없이 “왜 올라왔냐. 중공군이 온다. 다시 내려가야 한다.”며 또 다시 진주로 향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생활 중, 1952년 형님은 곧 휴전이 될 것 같다며 다시 학업을 시작하라고 권하셨다. 북한의 학교와 남한의 교육 체계가 조금 달라 이곳의 편제에 맞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북에서는 영어를 1년 정도 배우고 이후 노어를 배웠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북에는 계신 아버님, 어머님, 큰 누님, 동생 2명과는 소식이 닿지 않은지 벌써 오래였다. 그래도 학교를 마치면 다시 부모님께 돌아가야지 마음 먹었는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으리라 생각한다. 70세가 됐을 막내 동생도 여지껏 살아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형제들도 죽었다고 여기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생사를 알지 못해 답답하다. 요즘은 민간단체들의 주선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것도 중국과 맞닿은 함북도 지방 위주란다. 평안남도는 거의 힘들다고 한다. 소식을 모르니 그리움은 더욱 깊어지는 듯하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남은 희망은 이산가족 상봉뿐이다. 당연히 1차 모집 때부터 신청을 했지만 12만 8천명의 신청자 모두에게 행운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상봉이 반복될수록 기대와 실망은 점차 무뎌져 갔다. 아마 60년의 반복 속에 내성이 생긴 듯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년 전, 형님과 비디오 촬영으로 영상을 남겼다. 촬영 당시 이북에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비추는 걸 자제하라는 요구에 모처럼 한껏 꾸민 집안을 다시 손봤다. 벽에 걸린 액자도 떼고 그저 흰 바탕의 벽지에서 촬영했다. 가족들의 생사만 알 수 있다면 이런건 얼마든지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별 소식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무엇보다 자유왕래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럼 한 달음에 고향으로 달려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와 학교도 가보고, 친척들, 동네 사람들, 헤어진 친구들 생사확인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또 가족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이겠지만, 만나서 전해줄 옷가지, 먹을 것, 생계에 도움이 될 것도 챙겨야 한다고 하셨다. “인생 60년, 이리도 잠깐인데 뭐가 아깝겠어? 마음 같아선 가족들 편히 살게 모셔 와서 내 집도 내어주고 싶지.” 할아버지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1년에 4회 정도라도 고향에 쌀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고향 주민들에게라도 조금씩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큰 듯했다. “재산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동족은 먹여 살려야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우리 동족들도 같이 살아야지.” 할아버지의 마을은 40가구 정도인데 그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다.

“형제들끼리 싸우면 쓰나”

할아버지는 지난주 아들, 딸, 손주들과 식사를 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할아버지의 가슴 한 켠을 허전하게 했겠지만, 할아버지를 자극한 것은 다른 일이었다. “손주 녀석 둘이 밥 잘 먹다가 티격태격 싸우더라고. 괜히 울컥해서 형제들끼리 싸우면 쓰겠냐며 손주들을 혼냈지.” 물론 손주들은 아직 어리기에 옆에 있는 이들의 소중함을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손주들이 자라도 북에 있는 형제들과 60년간 그럴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아픔을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표현해도 아이들은 평생 이산에 대한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께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여쭤봤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눈물로 말을 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그런데도 뭐라 말해야 할지 생각이 안나. 고향 떠난 지 60년이 넘었는데 울먹이게 돼. 다른 이야기는 다 괜찮은데, 고향 얘기만 하면 왜 감정이 이런지. 이건 당해본 사람 아니면 몰라.” 그렇다. 우리는 모른다. 어찌 감히 할아버지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아픔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할아버지의 아픔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반복될 수 있음을.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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