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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한·독워크숍 | 독일통일을 회고하는 2가지 테마 2011년 6월호

2011 한·독워크숍

독일통일을 회고하는 2가지 테마

 

지난 5월 25일 서울 세종호텔 세종홀에서 평화문제연구소와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주최로 ‘독일통일을 회고하는 2가지 테마 : 통신망 혁신 및 가톨릭 교회의 역할’을 주제로 한 2011 한·독워크숍이 개최됐다.

이번 행사에서는 볼프강 뵈치 전 독일연방 우정통신장관과 베른트 쉐퍼 미국 우드로우윌슨센터 연구원이 참석해 주제발표를 했으며, 홍재형 통일교육원장과 신창섭 전 <MBC> 베를린특파원이 토론에 참여했다.

동독 통신 현대화 위한 ‘텔레콤 2000’

먼저 ‘독일 신연방주 통신분야 기반시설 재건현황’에 대해 주제발표를 한 뵈치 전 장관은 “1990년 통일 당시, 특히 동독의 통신기반시설 재건 작업이 가장 도전적인 과제였다.”고 회상했다. 일례로 동독지역의 전화망이 1935년에 구축된 것을 유지하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심각한 노후화 문제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당시의 독일 연방체신청과 그 자회사였던 독일 연방체신청 텔레콤이 가능한 신속하게 신 연방주(구 동독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통신망 현대화 작업을 위해 총 약 550억마르크(약 290억유로)를 투입, ‘텔레콤 2000’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1997년까지 독일전역에서 동일하게 현대화된 통신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구 동독 통신현대화 작업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재건작업의 가속화를 위해 구 동독지역에 구축되어 있던 기존 네트워크를 충분히 활용하는 과정과 사업을 둘러싼 이권 다툼을 조율하는 것 등의 어려움을 들었다.

예를 들어 동독 지역에서는 비밀경찰이나 대규모 국영 기업체들을 위한 기존의 특별 네트워크가 존재했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편입하기 위해선 민간업체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음에도 여기에 투입되는 자본의 효과에 대해 의문이 끊이지 않은 점과 당시 장거리 통신사업에 대해선 연방체신청이 독점운영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업자에 예외적으로 사업권을 인정하는 조치에 대한 노조의 반발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텔레콤 2000 프로젝트가 정보전달 기반시설의 조직적인 확충과 쇄신을 위한 장기적인 비전임을 인식시키며 기존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 민간업체의 역량강화와 참여를 지속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고 밝혔다.

결국 동독의 통신현대화 작업은 전화망 회선의 경우 1990년 동독에서 서독(111개→2,000개), 서독에서 동독(690→2,000개)으로 증가했고, ISDN의 경우 디지털 오버레이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순차적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지멘스, SAL 등 유수의 통신업체들과 협약을 맺어 회선용량의 확대와 안정화를 꾀했으며, 광대역 케이블망과 통신 및 위성망도 동·서독의 상이한 방식을 극복하고 동베를린, 라이프치히 등에 중계소를 설치하여 회선 연결용량을 4,000개로 증가시키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고 말했다.

그는 “재건사업 처음부터 미래 정보환경을 예측하여 최신의 현대화 작업을 실시했기 때문에 현재 동·서독 지역은 모두 동일한 통신 인프라 안에서 안정적인 네트워크 서비스를 향유하고 있다.”면서, 따라서 “통일 이후 독일연방의 통신분야 기반시설 구축 작업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한 토론으로 홍재형 통일교육원장은 “현재 남북 간에는 판문점 남북직통전화, 항공관제통신선, 개성공단 입주기업과 남한지역의 통신을 위한 회선, 군 통신선, 과거 경수로 건설을 추진할 때 설계 관련 데이터통신을 위한 통신망, 광케이블 등이 있어 인프라 측면에선 크게 문제없다.”면서도 “문제는 남북이 통합될 경우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장비나 시설이 노후화 된 관계로 교체의 문제와 교환방식 등 시스템의 호환성과 관련한 문제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며, “기술적 문제에 집중한다면 독일의 경험이 상당히 유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독 시절 국가와 가톨릭 간의 관계 고찰”을 주제로 두 번째 발표를 한 쉐퍼 연구원은 “동독의 전체주의 체제 아래서 가톨릭 교회생활은 두 가지 특징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신과 인간의 영적 만남을 위한 종교적 공간으로써의 기능과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사회적 공간으로써의 기능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후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주목했다.

그는 “동독에서 기본적 인권을 위해 투쟁했던 가톨릭 교육자들이나 학생들 그리고 신자들은 자신들이 정체성면에서 동독시민임을 부인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동독 가톨릭 사회가 1987년 드레스덴 가톨릭 회합과 1988년과 1989년 ‘평화, 자유, 창조 보존을 위한 에큐메니칼 회의’에 참여해 공개토론을 진행하는 등 동독 사회주의자들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 왔다.”고 밝혔다.

따라서 동독지역 가톨릭 안에서 태동된 이념을 극복한 사회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모국’이 아닌 ‘우리의 모국’을 중심으로 한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게 했으며, 이는 결국 통일 과정 중 통합적 기능면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가톨릭 교회생활, 사회적 공간으로 기능

이에 대한 토론으로 신창섭 전 <MBC> 베를린특파원은 “동독시절 많은 교인들이 비폭력 침묵시위를 전개하는 등 독일 통일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많은 경험과 지혜를 준다.”고 평가하고, 분단 당시 동독 가톨릭 사회에 대한 서독의 지원과 관련하여 결정주체, 분배투명성에 집중하여 질의했다.

이에 쉐퍼 연구원은 “자금지원은 당시 동독정부가 동독 내 교회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서독에 요청함에 따라 논의되기 시작했고, 서독 가톨릭계의 합의와 서독 정부 역시 유의미하다는 판단을 함으로써 결정되었으며, 분배는 동독 내 가톨릭 사회질서 안에서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진행되었다.”면서 “전체적으로 이러한 자금이 투입됨에 따라서 동독 가톨릭계는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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