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1년 6월 1일

기획 | 빈 라덴과 알카에다, 그들은 누구인가? 2011년 6월호

기획 | 빈 라덴 사망과 테러와의 전쟁

빈 라덴과 알카에다,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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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1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조 바이든 부통령, 마셜 웹 연합특수전사령부 부사령관, 데니스 맥도너 국가안보 부보좌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과 국방장관과 함께 미군 특수부대 네이비실 특수요원들이 9·11 테러공격을 자행한 알카에다 테러조직의 최고지도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뉴욕에서만 하루아침에 2,792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테러가 벌어지던 날 아침, 필자는 맨해튼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뉴욕타임스>를 훑어보고 있었다.

바로 그날, 그곳 하늘은 너무나 맑았다. 그러나 9·11테러로 맨해튼의 하늘은 화염과 음습한 먹구름으로 가려졌다. 뉴욕 시민들은 흔히 “뉴욕은 남녀가 바뀌는 일을 포함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곳이다.”라는 말들을 자주 한다.

그렇지만 9·11 같은 사건이 터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만큼 9·11테러의 실행자였던 알카에다, 그리고 그 테러의 기획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은 지난 10년 동안 뉴요커들에게 미움의 대상이었다.

지난 5월 2일 새벽 파키스탄의 은거지에서 미군 특수부대에 사살된 오사마 빈 라덴은 한마디로 논쟁적인 인물이다. 아마도 그만큼 극단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아온 인물은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빈 라덴은 악마의 화신이다. 미국 소학교 교실에서 어린이들은 빈 라덴을 마귀의 얼굴을 한 흉측한 사내로 그린다.

그러나 중동 이슬람권의 동조자들에게 빈 라덴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선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동맹에 맞서 싸우는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으로서의 모습이다. 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촌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념의 벽이 가로막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정치의식은 세 가지 적을 깨뜨려야 한다는 논리로 무장돼 있었다. 첫째 적은 미국, 둘째 적은 같은 아랍동포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이스라엘, 그리고 마지막 적은 이슬람 성지가 있는 중동 땅에 미국인들의 발길을 허용한 친미 아랍 군주들이다.

빈 라덴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의 가장 첫 번째 적은 옛 소련군이었다. 그 적을 마주친 곳은 9·11테러를 일으킬 당시 그의 근거지였던 아프가니스탄이었다.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

1957년 리야드에서 사우디 최대 건설회사를 경영하는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빈 라덴은 제다에서 수학하던 16세 때부터 몇몇 이슬람 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친 뒤 부친에게서 상속받은 건설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그에게 결정적인 변신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친소정권에 대항해 이슬람계 연합세력들이 정부군과 소련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한 바로 그 해에 빈 라덴은 대소 게릴라투쟁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내전 당시 아랍권에서 많은 지원자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몰려가 게릴라전을 벌인 바 있다. 정확한 숫자는 없지만 수천명(일설에는 3천5백명)의 지원자들이 아프가니스탄 국경과 맞닿은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무자헤딘으로 게릴라전에 투입됐다.

냉전시대 소련과 맞서던 미국도 당시 그곳에 교관을 파견했었다. 현재 반미, 반이스라엘 투쟁을 주도하는 이슬람 무장세력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참여했던 무자헤딘들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미 국무부가 해마다 봄에 내는 <테러보고서>는 이들을 가리켜 ‘아프간 동문회(Afghan Alumni)’라 부른다. 1980년대 말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간 동문회에 뿌리를 두고 조직한 테러조직이 다름 아닌 알카에다(우리말로는 ‘근거지’ 또는 ‘선봉’)이다.

‘아프간 동문회’와 알카에다

빈 라덴의 정치의식이 반소를 거쳐 반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90년대의 일이다.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하자 빈 라덴은 고국에 돌아왔지만, 이미 그는 평범한 사업가로 사무실에 앉아 있기엔 정치적 자의식이 강한 젊은이로 바뀌어 버렸다.

그런 그에게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일어난 1991년의 걸프전쟁에서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 반도에 상륙하자, “이교도의 군화 발길로 이슬람 성지가 더렵혀진다.”며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빈 라덴은 사우디 왕정에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났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동부 작은 도시 잘랄라바드로 근거지를 옮긴 것은 1996년. 그곳에 머물던 빈 라덴은 1998년 ‘유대인과 십자군에 맞서는 성전을 위한 세계이슬람 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시민과 군인을 포함한 미국인들과 그들의 동맹자를 죽이는 것은 ‘이슬람교도의 의무’라고 강변했다.

정치학자들에게 빈 라덴은 9·11테러 이전부터 연구 대상이었다. 따지고 보면 빈 라덴만큼 미국 정보 기구(CIA와 FBI)를 긴장시킨 인물도 없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인을 놀라게 한 대부분의 폭탄 공격에는 그가 관련돼 있다.

케냐 미국 대사관과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동시 폭탄 공격(1998년, 301명 사망), 예멘에 정박 중인 미국 구축함 코울 호 자살 폭탄 공격(2000년, 19명 사망) 등이 그러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01년 9·11테러를 기획하고 배후조종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반미저항조직 알카에다의 우두머리이자, 2001년 9·11테러의 기획자로서 무려 5천만 달러의 현상금이 내걸렸던 그의 죽음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비무장 상태의 빈 라덴을 체포하지 않고 즉결 처형하듯 사살한 것이 과연 적절했나, 미군이 빈 라덴 제거를 위해 편 비밀 군사작전이 파키스탄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 아닌가 등의 논란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빈 라덴 제거는 미국으로선 테러와의 전쟁에서 거둔 최대성과라 할 만하다. 이제 빈 라덴은 죽고 없다. 그렇지만 그가 조직한 알카에다의 2인자 아이만 알 자와히리(이집트 의사 출신)를 비롯한 잔존세력, 그리고 다른 자생적인 투쟁조직들이 제2의 대형테러를 저지를 가능성은 남아 있다.

김재명 / 성공회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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