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1년 10월 1일

영화리뷰 | 한국전쟁과 매기의 추억 2011년 10월호

영화리뷰

<적과의 동침> 한국전쟁과 매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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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총 12만2,799명, 납북자 수 8만4,532명.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죽은 남한지역 민간인 사망자 수다. 그동안 미군 및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문제가 논란이 되었지만 당시 북한군 및 토착 공산세력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의 수도 만만치 않다.

특히 북한군 점령지역에서는 지방 좌익들이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을 인민재판을 거쳐 처형했다. 이렇듯 학살은 어느 일방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간인 학살은 상호 보복차원에서 돌고 돌며 발생했다. 이 과정에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평택 이남을 중심으로 이승만 정부와 미군에 의해 노근리나 이리역 폭파사건과 같은 학살이 자행됐다.

마찬가지로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할 당시 토착 공산세력과 인민군에 의한 보복학살이 발생했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에는 전쟁 부역자혐의로 군경에 의한 보복성 학살이 진행되었다. 전쟁에 내재한 광기는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휴먼코미디로 소개되고 있는 영화 ‘적과의 동침’은 그 광기의 일면을 가볍게 그려냈다. 때문에 이 영화의 선전문구나 제목은 주제와 조금은 따로 노는 듯하다. 언뜻 제목만 보았을 때 1991년 제작된 조셉 루빈 감독의 동명작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enemy)’이 떠오른다.

미모의 여인 로라가 의처증이 심한 남편 마틴과 해변가의 저택에서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하며 해안에서 익사한 것으로 위장한 후 새로운 삶을 찾아 도망 다닌다는 것을 주제로 한 영화다. 하지만 한국영화 ‘적과의 동침’은 그런 부부 간의 애증을 그려낸 영화가 아니다. 물론 주인공이 ‘동침’(?)하는 장면도 나오지도 않는다. 수채화에 가까운 은은한 로맨스를 담고 있다.

지난 호에서도 소개했듯이 전쟁영화는 노래와 궁합이 잘 맞는다. 항상 영화 속 영상은 노래의 음률과 함께 한다. 이 영화에도 적절한 노래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매기의 추억’이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이 영화의 주인공인 김정웅(김주혁 분)과 박설희(정려원 분)는 노래 ‘매기의 추억’으로 연결되어 있다. 둘은 1940년대 항일운동을 하던 부친 간의 인연으로 만주에서 처음 만난다. 김정웅은 박설희에게 이 노래 ‘매기의 추억’을 불러준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한국전쟁이 시작된다. 영화의 무대는 전쟁분위기를 전혀 모르는 시골마을 석정리. 이곳은 박설희가 사는 곳이다. 이야기는 작은 시골마을 석정리에 북한군이 진주하면서 시작된다. 그 옛날 만주에서 보았던 문학청년 김정웅이 북한군 정치장교가 되어 인민군을 이끌고 나타난다.

“남조선 인민들이 보고 있지 않네? 허리 펴고 씩씩하이 걸으라우!” 대위계급장을 단 지휘관 김정웅은 부하들에게 호기롭게 명령하면서 마을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그리고 마을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설희를 발견한다. 김정웅은 단번에 알아보지만 설희는 김정웅을 알아보지 못한다. 뒤늦게 설희는 빨래하다 발견한 수첩을 통해 정웅을 알아보지만 재회의 순간은 조금 밋밋했다.

정웅은 인민군의 방침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트리는 설희를 매번 부하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감싸준다. 수채화 같은 김정웅식 사랑법이다. 둘만의 로맨스는 다소 갑갑하고 뜨겁지 않게 진행된다. 더구나 설희에게는 반공청년단 소속의 약혼자가 있다. 정웅은 그 사실을 알고도 설희를 보살핀다.

그 와중에 전선의 상황이 역전되어 인민군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웅은 그동안 마을사람들을 동원해서 팠던 방공호의 목적을 연대장에게 듣는다. 그 곳 방공호는 바로 양민학살을 위한 무덤이었던 것이다. 정웅은 마을사람들을 다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과 인간애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절규하는 ‘만세’

이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평택지역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었다. 이념으로 덧칠되어 있는 한국전쟁사에서 순수한 시골마을 사람들과 인민군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발생했던 일들을 소재로 했다. 물론 주인공들의 로맨스는 영화적 재미를 위한 픽션이다. 김정웅은 계속해서 말한다.

“전선을 지원하고 38선을 넘으면서 말이야 나는 가슴이 벅찼어. 드디어 억압받는 남조선인민들을 해방할 수 있구나. 그런데 이상하지?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말이야 내가 그 인민들을 억압하고 있는 기야. 가난하고 무지한 놈들이라고 무시하고 반동이라고 몰아가고 있는 기야.”
그랬다.

시골마을에 무슨 이념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정웅이 마을사람을 살려주려는 시도는 연대장에게 발각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모두 방공호로 끌려나와 총살되기 직전에 놓인다. 이때 미군의 기습이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인민군이 죽고 그 과정에 정웅과 설희도 서로 껴안은 채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둘 간의 추억이 담긴 ‘매기의 추억’이 은은하게 깔린다.

이들의 죽음은 차라리 평온했다. 죽음으로 인해 맺어진 사랑이었다. 그렇게 평온한 모습의 두 주검 위로 낙엽과 꽃잎이 쌓인다. 영화는 수채화 같은 슬픈 사랑을 노래하면서 시대의 아픔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총을 들이대는 미군들을 향해 마을주민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짖는다. 그들의 얼굴표정이나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동이나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만세를 절규할 뿐이다.

그 모습을 돌아누운 인민군 시체가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본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떠한 언어보다 강렬한 전쟁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그 뒤로 매기의 추억과 만세소리가 교차되면서 묘한 여운을 만들어 냈다. 매기의 추억에 나오는 “금잔디 동산”은 두 연인뿐 아니라 당시 모든 이들이 꿈꾸는 피안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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