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에게 들려주는 남북한 이슈 | 해방과 분단 초기 통일을 위한 노력은? 2011년 10월호
청소년에게 들려주는 남북한 이슈 6
해방과 분단 초기 통일을 위한 노력은?
다양한 세력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동서냉전의 태동기라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 남북한이 스스로의 힘과 의지만으로 통일을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한반도 전역에 공산주의국가를 세우려는 북쪽 세력과 서구식 민주주의 정부를 먼저 세워 이를 저지하려 했던 남쪽 세력 간의 타협 불가능한 다툼은 결국 분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과 대결 속에서도 통일국가를 세우려던 노력은 존재하였다.
좌우합작, 이념대립과 갈등으로 무산돼
해방시기 통일조국의 탄생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대표적인 사례로는 몽양 여운형과 백범 김구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먼저 여운형의 경우를 살펴보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하였던 그는 1945년 9월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 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인정을 얻지 못해 실패했다.
그해 12월에는 ‘조선인민당’을 조직하였고, 이를 계기로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여운형은 중도 우파를 대표하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을 주도하였다. 그는 좌우의 대립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으로 통일 정부가 수립되면 좌우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
여운형은 박헌영이 주도하는 ‘3당 통합’에 반대하여 남로당에는 참여하지 않고 ‘근로인민당’을 결성하는 등 중도 좌파로서 민주적 사회주의 건설과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운동을 펼쳤다. 그는 자주적 민족통일 국가를 완성하고자 했는데, 이는 그것만이 완전한 민족독립의 실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의 이러한 확고한 목표는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통일전선전략으로 나타났다. 그는 대중정당론을 기본으로 통일전선, 좌우합작, 남북연합이라는 일관된 노선을 지향하였다. 냉전구도가 공고화되면서 분단이 불가피한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에서도 여운형은 자신의 정치노선을 지키는데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노선은 현실에서 출발하였으나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편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김구는 누구보다도 민족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을 계기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김구는 ‘3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함’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동시에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김규식 등과 함께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정치협상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를 반대하는 남북 조선의 모든 사회단체 대표들과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한다.”는 회답을 하였다. 이승만과 한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연석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북진통일론 대 민족해방론
남북한 연석회의를 반대하는 세력으로부터 용공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김구가 염원한 것은 오직 민족의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1948년 4월 그는 김규식, 김붕준, 엄항섭, 조소앙, 허헌, 홍명희 등과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북한은 연석회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만 하였고, 김구 일행은 아무런 성과 없이 귀환한다. 이후 UN 감시 하에 5월 10일 남한에서 선거가 치러지고 제헌국회가 구성됨으로써 통일정부 수립은 끝내 좌절되었다.
여운형과 김구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꿈은 사라지고 두 사람 모두 암살로 일생을 마감하는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다. 동서냉전이라는 국제정세의 격변과 국내적으로 치열했던 이념대립은 결과적으로 민족통일을 원하던 많은 이들의 꿈을 펼치지 못하게 하였다. 이 결과 남북한에 각각의 정부를 수립한 세력들은 북진통일론과 민족해방론을 주장하면서 갈등하다가, 결국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상처를 다시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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