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 “대북정책 기상도를 바꿔라” 2011년 11월호
시론
“대북정책 기상도를 바꿔라”
신묘년의 해도 저물어 가고 있다. 그런데 남북관계의 기상도는 여전히 계속 흐림이다. 당국 간 기싸움과 대치상황이 살벌하다. 서해의 무력충돌, 북한의 ‘핵보유국·강성대국’의 호언, 남한의 공공연한 급변사태 대비론, ‘도둑같이 올지도 모를 새벽통일’에 대비한 통일세의 공론화, 남북경협의 사실상 전면 중단과 인적 왕래의 중단, 반김 풍선삐라·사격표적지와 무차별 보복타격 위협의 적대 심리전 공방 등이 먹구름을 형성하고 있다.
남북관계 기상도 여전히 흐림
그나마 남북은 어렵사리 개성공단을 ‘서로 마지노선으로 잡고 있는 끈’이라며 보듬고 있다. 대북지원은 ‘배불뚝이’ 김정일 정권의 수명 연장만 도울 뿐, “차라리 남아도는 쌀을 사료용, 막걸리용으로 돌리는 게 났다.”는 정신 나간 각료의 망언까지 나온 상황에서도 아사지경인 북한의 영·유아 ‘피그미 세대’, 취약계층용 인도적 지원은 간헐적으로 이뤄져 왔다. 또 뜻있는 종교인, NGO, 문화예술인들의 방북이 가뭄에 콩 나듯 이어지고 있다.
과연, 이명박 정부가 임기를 마치기 전에, 레임덕 현상에 휩쓸리기 전에, 남북관계의 먹구름을 흩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답하려면, 먼저 정부가 표방해 온 대국민 약속과 공약을 냉철하게 일별해 봐야 한다. 중핵적인 것들만 골라 보면, 다음과 같다.
△ 상생공영의 남북관계 발전으로 ① 평화공동체 ② 경제공동체 ③ 행복공동체를 실현해 나간다. △ 대북정책의 근간은 ‘비핵·개방·3000구상’의 실천이다. △ 북핵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6자회담을 통해 북핵프로그램의 핵심부분 폐기와 함께 북한의 안전보장과 국제적 지원을 일괄타결하는 이른바 ‘그랜드 바겐’을 추진해야 한다.
△ 북한정권과 북한동포는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퍼주기’는 안된다. △ 이산가족 문제, 국군포로 문제, 납북자 문제와 인도적 지원은 북핵문제 등 정치적인 문제와 상관없이 ’인도주의정신의 존중 원칙’에 따라 추진한다(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는 ‘자국민 보호’라는 관점에서 ‘우선적인 과제’로 추진한다). △ 식량 지원, 보건·의료 협력 등 인도적 구호 지원과 함께 농업분야의 지원도 추진함으로써 북한의 자립 여건을 만들어 나간다.
과연, 이 약속과 공약들이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솔직히 점수를 매기기가 민망스럽다. 정부가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겸허하게 성찰해 봐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이 무엇인가? 1년여 남은 임기 중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또한 차기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평화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정책의 재조정은 가능한 것인가? 대북정책의 지지부진이 북한정권과 ‘좌파정권들’ 때문이라며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이젠 지겹다는 반응이 높다. 너무 자주 써먹은 터라 ‘늑대와 양치는 소년’의 이솝우화를 떠오르게 한다.
이제 ‘국민통일꾼’의 입장에서 한두 가지 사안을 직언하고자 한다. 첫째, 북핵문제다. 우선 “핵을 포기하고 또 북한 스스로 개방하면,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 만들어 주겠다.”는 구상 자체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북한정권과 북핵문제의 속성을 꿰뚫어 보지 못한 채 대형의 입장에서만 내놓은 제안이었다. 전혀 역지사지(易地思之)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고려가 없는 아전인수(我田引水)적 주장일 뿐이다. 상대방이 거부할 것이 뻔한데…
‘그랜드 바겐’ 전략 본격적으로 전개할 때
정부는 이제 6자회담의 진전과 성공에 온갖 지혜와 땀을 쏟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그랜드 바겐’ 전략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때이다. “줄 것은 주고(생존권 보장과 경제지원) 받을 것은 받는(핵포기와 남침도발 포기)”, ‘포괄적 빅딜’ 협상방식이 ‘9·19공동성명’의 이행방안과 포개지도록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와 관련 지난 10월 19일 김정일의 언급(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과의 특별서면회견)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제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 “9·19공동성명을 동시행동의 원칙에서 전면적·균형적으로 이행함으로써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해 나간다.”는 원칙적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제 정부는 ‘두고 보기 전략(wait-and see policy)’, 소극적인 ‘대미편향적 공조’의 틀을 넘어서 ‘독창적인 북핵 협상 마스터플랜’을 마련해야 한다. 북핵문제는 결코 1년 내에 끝날 사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차기정부도 기꺼이 바통을 이어 받을 수 있는 대전략 체계에 따라 협상에 임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인도적 문제다. 지난 10월 14일 유종하 대한적십자 총재가 퇴임식에서 내뱉은 뼈있는 말이 생각난다. “좌절감을 가지고 한적을 떠난다. 한적은 정부와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임기 중 북한 취약계층도 열심히 돕고 이산가족 상봉도 활성화하고 싶었다.” 이는 정부의 지나친 간섭을 비판하고, 또 실용성·유연성·상생공영의 표어와는 거리가 먼 대북강경정책의 편향성을 꼬집은 것으로도 이해된다. 말로는 ‘최우선적 해결 노력’을 되풀이하면서도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였다는 자탄의 발로일 수도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류우익 신임 통일부 장관은 첫 약속으로 “형편이 허락하는 한, 조속한 시일 내에 이산가족 재상봉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나섰다. 오랜만에 듣는 반갑고 신선한 말이다.
차제에 정부와 한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한마디 말로 권면코자 한다. “미국정부와 미국적십자사처럼 하시라!”고. 한국은 조용한데 오히려 미국은 재미한인동포 이산가족들(10여 만명)의 고통 경감을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 측은 지난 4월부터 조용히 끈질기게 북한당국자들을 만났다. 급기야 쌍방 당국은 우선 재미동포 10가족의 생사확인과 서신교환 시범사업부터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미 국방부(전쟁포로·실종자담당국)는 북에 미군유해 발굴회담을 제의하는 서한을 발송(8월 6일), 10월 18일 방콕에서 본격적으로 사업재개 방안 협의에 들어갔다. 그동안 미군유해발굴 공동작업은 물밑협상’으로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1996~2005년 10년 간 33회 실시, 230여 구의 유골이 미국 측에 반환되었다. 북한 측도 외무성 대변인의 회견을 통해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대하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미·북 간 협상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적대국 사이인데도 쌍방이 협상을 성공적으로 전개하고 있는데, 동족인 우리는 서로 티격태격 심리전 공방에만 열을 올려 왔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류 장관의 용의 표명에 머물지 말고 우리 쪽이 먼저 나서라. 그리고 가용한 수단을 총동원하기 바란다.
남달리 인도적 문제에 적극적이며 남북정상회담 중재 용의까지 공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중재 역할도 정중히 요청해 볼 일이다. 남북 간 직·간접 채널들, 류 장관의 베이징 채널, 국제적십자 채널 등을 풀가동하여, 인도적 문제 해결 협상에 적극 나서기 바란다.
생사 확인, 서신거래 및 우편물 교환, ‘우리 측 노부모의 고향 방문, 장례식 참석, 사망가족 성묘, 시범적 재결합 사업을 비롯하여 국군포로 송환 문제, 한국군 유해와 인민군 유해 공동발굴 작업, 납북자가족 문제(517명) 등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수두룩하다.
말 그대로 쉴 새가 없다. 정부와 한적은 협력하여 ‘물밑협상 채널’을 열고, 동시에 남북적십자회담의 재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시간이 너무 없다. 90세를 바라보는 노부모, 국군포로의 생명을 구하고 한을 푸는 일이야 말로 대한민국 정부와 한적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책무요, 성업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인도적 문제, 임기 중 진전과 성과 낼 수 있는 현안
마지막으로 인도적 지원 문제다. 정부는 북한정권과 북한동포를 구별한다는 구호를 진정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대북지원 대상은 분명 북한정권이 아니라 북한동포(주민)이기 때문이다.
인도적 지원에 관한 한, 어떤 경우에도 까다로운 꼬리표를 달아서는 안 된다. 전략물자화가 우려된다면, 쌀은 옥수수, 밀가루, 잡곡, 분유 등으로 대체하면 된다. 모니터링은 국제기구와 함께 강화된 아이디어를 창안, 우리 측 참관요원의 수와 현장 확인의 범위 확대 등을 요구해 나가야 한다.
다만 정부 차원의 대규모 식량, 비료 지원 등은 정부의 고유 권한이고 책임으로서 초당적·국민적 합의를 거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산가족 문제 등 인도적 문제 관련, 북측의 전향적 조치를 이끌어 낼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것도 정부의 몫이다. 정치적 이용목적으로 그르치지 않는 한, 인도적 지원은 ‘퍼주기’가 아니라 ‘동포애적 사랑 나눔’이요, 북한동포의 ‘마음 퍼오기’의 본(本)임을 인식하기 바란다.
요컨대, 북핵문제는 필경 시간적으로도 이명박 정부에서 매듭짓기 어려운 중·장기적 과제다. 그러나 인도적 문제는 마음먹기에 따라 임기 중에 괄목할만한 진전과 성과를 낼 수 있는 현안이다. 아무쪼록 정부는 명실상부한 ‘상생·공영의 대북 포용정책’으로 남북관계의 기상도를 흐림에서부터 맑음으로 바꿔 나가기를 충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양영식 / 전 통일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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