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 젊은 이방인의 일기장 ‘무산일기’ 2011년 7월호
영화리뷰
젊은 이방인의 일기장 ‘무산일기’
지난 4월 개봉한 독립영화 <무산일기>는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1만 관객을 돌파했다. 뿐만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시작으로 모로코 마라케쉬국제영화제 대상, 네덜란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대상 및 국제비평가협회상, 프랑스 도빌아시안영화제 심사위원상, 폴란드 오프플러스카메라국제독립영화제 대상, 미국 트라이베카영화제 신인감독상,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 신인감독상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잇단 호평을 받고 있다.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가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영화제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지만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심적으로 무겁기만 했다. 물론, 영화는 현실이 아니기에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현대 사회인들에게 <무산일기>는 우리의 감성을 잠시나마 자극한 괜찮은 영상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지금까지도 불편함과 답답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무산일기>가 우리 사회의 북한이탈주민 문제 본질을 담담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은 바로 남한에서 북한에 삐라를 살포한다는 TV뉴스를 등지고 북한이탈주민들이 모여 앉아 소주를 마시는 모습이다. 이 장면에서 북한이탈주민들은 정치적 혹은 이념 문제, 섹스 문제 등 각기 다른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자유로운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과연 북한에서의 생활총화, 인민반회의, 아침독보회 등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고기도 배불리 먹는, 현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들이 갖는 느낌은 어떨까?
주민번호 125로 시작하는 ‘주홍글씨’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을 떠나기 전에 상상했던 자신의 모습과 현재 자신의 모습에서 큰 괴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영화는 “잘 할 수 있습니다.”를 외치는 승철에게 일할 기회도 주지 않으며 임금을 착취하는 우리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처럼 <무산일기>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열악한 삶을 그대로 담고 있다. 우리 헌법에는 자유가 보장되고 누구에게나 평등하다고 법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과연 북한이탈주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이러한 기본권이 적용되는가? 그리고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기회가 주어지고 성공할 수 있는가?
물론 북한에서의 삶과 절대 비교하자면 남한사회에서의 삶이 더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한으로 넘어오기 전에 갖고 있던 기대의 좌절과 남한에서의 부정적 편견은 절대적 삶의 질이 향상된 것에 대한 만족감을 여지 없이 상쇄하고 있다. 게다가 주민등록번호 ‘125’로 시작하는, 즉 북한이탈주민임을 나타내는 ‘주홍글씨’는 우리 사회가 이들을 진정으로 포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결국 그들은 북한을 탈출하면서부터 이미 노마드적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굴레에 갇히고 만 것이다.
‘우리 이웃’의 윤색되지 않은 이야기
영화에서는 경철이 가게에서 바지를 훔쳐 입는 모습, 노래방 도우미들을 농락하는 모습,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에게 사기를 치는 모습 등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이들의 윤색하지 않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북한이탈주민의 문제에 보다 깊숙이 끌어들이려는 감독의 의도일 것이다.
<무산일기>는 사회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사실에 기반한 픽션이다. 더욱이 2007년 개봉한 영화 ,화려한 휴가>처럼 정치적 메시지를 갖고 있지도 않고, 신파나 가족주의에 의존하고 있지도 않다. 즉 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구석진 이면의 현실을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게 파고들고 있다. 그리고 거창하지 않게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영화를 전개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무산일기>는 북한이탈주민의 현실을 담담하게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 문제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게끔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무산일기>에서 그려진 북한이탈주민의 삶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을 비추고 있다. 마주보고 있는 거울처럼 말이다. 일상은 반복되고 있으며 항상 지루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황에는 나아지길 바라는 작은 소망보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함축되어 있다. 즉 우리에게 삶은 그 자체가 큰 스트레스이며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은 없다. 다만 그것을 찾아 유의미하게 혹은 무의미하게 공간에 궤적을 그려나갈 뿐이다. 우리의 삶은 영화 속 주인공 ‘승철’이 공장에서 커피를 마시고 커피 잔을 씻는 뒷모습에 묻어나는 쓸쓸함과 중첩된다.
<무산일기>는 낭만적인 해피엔딩이길 바라는 관객의 기대를 무심하게 거절한다. 영화는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고자 하는 관객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끝을 알리는 엔딩음악도 없이 검은 화면으로 조용히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영화는 끝났지만 현실은 어둡기만 하다. <무산일기>는 또 다른 ‘우리’인 이들의 일상을 무채색의 모습으로 그려냈고 무겁게 끝을 맺었다.
필자는 <무산일기>의 주인공 ‘전승철’과 사적으로 알고 지냈다. 영화에서 그려지지 않은 가족사도 알고 있다.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가벼운 흥분과 심장을 내리누르는 중량감을 번갈아가며 경험했다. 이 영화는 젊은 이방인의 일기장이다. 북한이탈주민의 남한사회 적응문제라는 정치적 명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웃의 이야기로, 우리들의 이야기로 한 번쯤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유석 / 북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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