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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탄소하나 산업의 기원을 찾아서 | 인조석유 설비의 기원, 아오지 석유화학콤비나트 201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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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탄소하나 산업의 기원을 찾아서 2

인조석유 설비의 기원, 아오지 석유화학콤비나트

 박종철 / 경상대 통일평화연구센터

지난해 4월 26일 평양의 한 주유소 모습 ⓒ연합

지난해 4월 26일 평양의 한 주유소 모습 ⓒ연합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거대 군함들, 특히 군함의 무게는 참전국 해군력의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거대 군함은 대량의 연료 ‘석탄’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전쟁에서는 영국과 같이 세계 곳곳의 식민지에 군항을 만들어 석탄, 탄약, 물, 식품 등을 공급할 수 있는 국가가 유리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 쟁탈전에 후발로 참가한 미국은 석탄이 아닌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여 미국 군함의 기동성은 탁월하였고, 당시 세계는 그 광경에 놀라게 되었다. 반면에 역시 후발국으로 식민지 쟁탈전에 참전한 독일과 일본은 유전과 석탄 항구 확보에 한계가 있었고, 자연히 일본은 석탄을 석유로 생산하는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북한 아오지에 석탄액화설비를 건설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는 나치 독일과 협력관계에 있었다. 일제는 독일, 영국 등으로부터는 ‘인조석유 기술’을, 미국으로부터는 ‘원유 정제 기술’을 전수받고 있었다. 일제는 전수받은 기술을 토대로 조선, 일본 본토, 사할린, 만주와 중국 본토 등에 다양한 인조석유 산업 설비를 건설하였다.

일제, 독일에서 전수받은 인조석유 기술을 아오지에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일제는 일제 해군성 연료창(燃料廠, 연료 공장), 남만주철도주식회사(당시 군산복합체, ‘만철’), 관동군을 중심으로 하고 도쿄대학 및 각 대학, 연료연구소, 재벌, 화학기업 등이 참여한 ‘군산학연(軍産學硏) 복합체’를 구성하여 공동으로 기술개발과 생산실험을 실시하였다. 이 중에서 해군성, 만철, 관동군은 ‘만철 대련(大連) 중앙시험소’에서 무순()탄광의 유혈암(Oil Shale)의 건류실험을 하였고, 유혈암 인조석유 추출에 성공하였다. 이는 일본에서 ‘세일 에너지 개발(인조석유 자원개발)’에 성공한 첫 사례가 되었다. 동시에 해군 연료창은 1921년 정유소를 건설하여 원유 정제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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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의 인조석유 개발을 주도한 도쿄대학 오시마 교수와 요나이 해군상은 유럽과 일본의 인조석유 개발 기술을 3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지난 호에 게재한 김일성종합대학 김태문 교수도 <노동신문>에 이와 유사한 설명을 하고 있음) 첫째는 건류법(乾溜法)이다. ‘coal carbonization’이나 ‘dry distillation’으로 불리는 ‘건류법’은 석탄(갈탄)이나 유혈암을 공기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가열하여, 반성코크스(주체철의 원료), 콜타르, 석탄가스 등을 얻는 방식이다.

둘째는 수소첨가법(水素添加法, 베르기우스법)이 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Friedrich Bergius)가 1913년 개발한 것으로, 내열강철통에 석탄을 잘게 분쇄하여 넣고 직접 고온고압을 가하여 수소를 첨가하는 ‘액상화 방법’이다. 한 마디로 압력솥에 넣고 끓이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일본질소산업’ 등 전문 화학회사는 주로 이 ‘수소첨가법’을 인조석유 공정에 도입하였다. ‘일본질소산업’은 일본 해군성과 노구치 시타가우가 아오지에 건설한 당시 세계 유일의 액화석유 공정설비로, 그 시점에 일본은 이를 극비사항으로 다뤘다. 또한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이러한 인조석유 기술을 일정 기간 동안 기밀로 봉인하였다.

셋째는 가스화(Fischer-Tropsch synthesis process, 피셔 트로프슈법) 이다. 이는 석탄을 일산화탄소와 수소(H₂+CO)로 ‘가스화’하고, 촉매를 이용하여 탄화수소로 인조석유를 만드는 방법이다. 또한 다양한 유기화학 생산물을 제조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가스화’ 방법은 1921년 독일 가이자 빈루에르무 연구소 석탄 부문이 기초기술을 개발하였고, 1923년에는 인조석유를 추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미쓰이 등 일본 재벌은 주로 이 세 번째 인조석유 추출 방법인 ‘가스화 공정’을 도입하여 사용했다.

이상 3가지 인조석유 공정기술로 독일은 세계대전을 치를 때 전투기 연료까지 생산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석탄에서 추출한 액체석유 연료의 연간 최대량이 500만t이었고, 나치 독일의 강제 점령지까지 포함하면,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생산한 원유 200만t과 루마니아 등지에서 수입한 분량까지 대략 총 700만t 정도 되었다. 독일에서의 석유 생산량은 1943~1944년 5월에 최고치를 기록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항공유 월 15만t(이중 공군이 월 13.5만t) 생산을 비롯해 자동차 휘발유는 민간용 월 2.5만t, 수출용 월 2.1만t, 육군용 월 13.5만t이었고, 디젤유 군수용 월 7.5만t, 디젤유 민간용 월 4.5만t이었다.

위의 표처럼, 독일은 ‘수소첨가법’으로 항공기용 연료의 95%를, 전체 석유사용량 700만t 중에서는 약 400만t을 생산하였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인조석유 공정기술을 사용하여 석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석탄 2천만t 당 석유 400만t의 생산이 가능하다. 즉, 투입되는 총 석탄량에서 20% 가량의 석유가 추출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본래 약 4t의 석탄으로 인조석유를 만들면 약 1t 가량이 생산된다. 하지만 석탄에서 석유를 추출할 때는 열과 압력을 가하거나, 전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때 약 1t 가량의 석탄이 더 소모되는 것이다. 따라서 석탄 4t과 연료용 석탄 1t이 곧 인조석유 1t이 된다.

북한의 연간 석탄 채탄량을 인조석유로 환산하면 얼마?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2010년 북한의 석탄 채탄량은 약 3천만t 정도다. (최근 북한의 채탄량이 급증하고 있으므로 현재는 2010년보다는 상당히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됨) 당국의 공식 통계 이외에 필자가 인터뷰한 탈북자에 따르면, “사영 탄광의 석탄 생산량이 국가 탄광의 2~3배 정도 되기 때문에 북한에서 총 생산되는 석탄의 양이 1억t은 넘을 것이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탈북자의 정보를 토대로 북한의 한 해 총 석탄 채탄량을 1억t이라고 가정하고 석유로 환산해본다면, 총 석유량은 약 2천만t이 되는 것이다. 현재 인조석유 생산의 최고 기술을 가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재 기업 사솔(SASOL) 같은 경우 더욱 효율적으로 인조석유를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북한의 기술수준이 시험수준이라면 생산효율성이 훨씬 떨어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80403_143319나치 독일에서 ‘수소첨가 방식’으로 가솔린을 생산한 13개 공장을 살펴보면(왼쪽 표 참조) 대부분 주원료가 북한의 아오지에서 생산되는 갈탄(Brown Coal)과 같은 원료였다. 그리고 이 원료를 건류한 ‘갈탄 타르’에 수소첨가 방식을 사용해 휘발유를 생산하였다. 그 후 공정으로 ‘알킬레이션 촉매공정(고체산촉매를 이용한 제조법으로 산성에 바탕을 둔 촉매작용)’을 통하여 ‘옥탄가(가솔린이 연소할 때 이상폭발을 일으키지 않는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를 높여 항공기용 휘발유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는 김일성종합대학 화학과 김태문 교수, 국가과학원 함흥분원 김류성 박사, 함흥화학공업종합대학 부총장 신동철 교수 등의 설명과 유사하다.

‘알킬레이션 공정’을 통하여 옥탄가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만약 옥탄가가 낮은 항공유 가솔린을 전투기에 넣는다면 전투기 엔진의 성능이 저하되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수용 버스가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유사연료를 주입하여 속도가 늦어지는 것은 북한 같은 산업구조에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전쟁 상황에서 탱크와 전투기의 속도와 출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수용 연료와 달리 군수용 연료에서 용도에 따른 ‘최적화된 연료’를 주입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다.

즉, 북한이 과연 석탄으로 인조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지 못지않게 중요한 연구 주제는, 인조석유를 만들어 내는 북한의 현재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과거 한국농촌에서 아스팔트를 절도하여 경운기용 유사연료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농가도 있었고, 탄광에서 채탄한 석탄으로 석유를 만들어 사적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유해가스 중독으로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에서도 고난의 행군 시기 유사한 현상이 있어 이를 단속하는 일이 있었다. 인조석유 생산의 기술 원리는 어렵지 않지만, 과거 한국농촌의 농민이 사용한 경운기용 유사석유 생산기술 수준인지 혹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솔의 기술 수준인지에 따라서 북한의 인조석유산업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온성군 아오지의 ‘석탄화학콤비나트’를 구글 위성으로 보면, 10여개의 석유설비로 추정되는 둥근 원형의 설비를 관찰할 수 있다. 탈북자 인터뷰에 의하면, 이는 ‘인조석유 설비’로 ‘아오지탄광연합기업소’의 120기업소라는 주장을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향후 이에 대한 추가 검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 이후, 미국은 일본의 석유, 철, 공작기계 등 주요 공업 능력의 원료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1939년 7월에는 미·일 통상항해조약을 파기하고, 1939년 12월에는 미국 기업이 일본에 항공기용 가솔린 제조설비 건설과 건설권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인 이른바 ‘도의적 석유 금수 조치’를 선언했는데, 이후 단계적으로 경제 및 석유 제재의 강도를 강화하면서 1941년 8월에는 일본에 대한 모든 석유 수출을 금지하였다.

1939년 3월, 일본 중의원(하원)에서 요나이 미츠마사 해군상은 당시 일본의 인조석유 개발 상황에 대하여 “일제의 만주와 중국 침략에 대하여, 당시 미국은 ‘도의적 석유 봉쇄’라는 제재조치를 실시하였고, (미국의) 석유 봉쇄에 대응하여 일제는 진주만 침공을 논의하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석유에 대한 경제제재’는 군사적 제재로 가는 핵심과정이었다. 1939년 일제는 석유 수입의 9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도의적 석유 금수 조치’를 41년까지 강화시켜나간 것이다. 이러한 ‘제재’와 ‘도발’이라는 맥락은 현재 김정은 체제의 북한과 상당히 유사하므로 당시 요나이 해군상의 핵심 발언을 몇 가지 정리해 비교해 보고자 한다. 당시 일제도 현재 북한과 비슷하게 기술적 난제와 반응통의 소재, 자금 문제 등을 고민하고 있었다.

“천연연료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일본)에서 중유, 석유 등 액체연료의 자급자족을 달성하기 위하여 ‘제국연료회사’를 중심으로 하는 인조석유 사업의 발전시키기 위한 이번 회의에서 현황과 장래성에 대하여 토의했다. 10여 년간 해군의 노력의 결과로서 인조석유 사업 연구가 완료되고 공업화로서 ‘채산성’이 있는 범위에까지 도달했다. 조선 아오지, 조선 영안, 와니시, 우베, 나이호로(사할린)의 각각 인조석유 공장은 조업을 시작했다. 그 외의 공장에서도 곧 조업을 시작할 것으로 예상되고, 이 사업의 현황과 장래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전망이 된다. 그리고 인조석유 사업의 기술적 문제에 관하여 첫째, 제조 방법, 둘째, 인조석유 기계 제조 기술(공작 기술), 셋째, 기계 제조 능력(공작력)의 3가지 점에서 모두 ‘외국 기술원조’가 필요 없게 되었다. 인조석유의 생산 품질과 양은 천연석유와 같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 요나이 미츠마사 해군상

인조석유 연구 완료 아오지와 영안 공장 조업 시작

일본은 1936년 당시 조선, 만주, 소련 국경의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면 회암동에 전쟁 수행에 필요한 석유공급을 위해 ‘아오지 인조석유공장’을 건설하였다. 공장은 만주철도의 아오지 역에서 수 km 거리 내에 건설되었다. 이 공장에서는 세계 유일 독자적인 ‘수소첨가식 직접액화법(베르기우스 공법)’으로 휘발유·석유·경유·중유·메틸알코올·윤활유 등을 생산하였다.

‘아오지’는 국경지대로 최전선이었고, 더욱이 1938년 ‘아오지 인조석유공장’ 부근에서는 ‘장고봉(張敲峰) 전쟁’과 1939년 노몬한 전쟁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아오지 군수공장 상황은 기밀이었다. 1938년 1월 <동아일보>에 의하면, 아오지 탄광의 인조석유 개발은 국방 및 산업 상의 이유로 건설되었으며 휘발유와 중유 등 연간 1백만kl(킬로리터)의 생산을 목표로 ‘석탄액화설비’를 건설하였다. 이를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면(1kl 당 1천l, 약 10억l), 86만t(630만 배럴)이다. 1938년 3월 아오지 공장에서 석탄액화 인조석유는 약 6만t 규모로 부분적인 생산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도의적 석유 금수 조치’가 강화되자 1939년에는 대규모로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같은 해 7월 중순 <동아일보>에는 “조선 석유를 통하여 일반 시장에까지도 판매할 정도”라고 보도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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