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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선언과 협정, ‘수단’으로 접근해야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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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제 우리는

큰 꿈을 꿀 수 있다

김영희 / 안보·국제문제 칼럼니스트, 전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한반도의 불가역적 평화, 이것을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로 선언했다. 쉽지 않은 과제다. 동북아시아는 국제정치의 청정지역이 아니다. 다양한 변수가 뒤엉켜 작용하는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그 어떤 내·외적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을 평화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도 현실적으로 실현하기는 쉽지가 않다. 특히 이 지역의 질서를 지난 70년 동안 지배한 패권국가 미국은 한국의 안보를 책임진 동맹국이다. 미국의 독점적 패권에 도전하여 태평양을 동서로 양분하려는 중국은 북한의 후원국이다. 현재의 패권국가와 잠재적 패권국가는 이미 전쟁 중이다. 군사적인 열전이 아닌 경제전쟁이다.

남북한과 미국은 이런 지정학적 환경에서 북한의 핵·미사일을 영구적으로 폐기하고, 상응조치로 미국이 북한의 체제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4·27 판문점선언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 6·12 싱가포르선언에서는 이 판문점 약속을 확인하고 “비핵화를 향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둘 다 원론적 약속이다.

지난 9월 19일의 평양공동선언은 판문점선언과 싱가포르선언의 그릇에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3가지 중요한 약속을 했다. 첫째,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우선 영구적으로 폐기한다. 둘째, 미국이 6·12 북·미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다. 셋째, 남과 북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긴밀히 협력한다. 여기서 북한이 말하는 미국의 상응조치는 종전선언과 대북제재의 완화나 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문 대통령이 에 전한 플러스 알파와 비핵화 협상의 운명

북한이 요구하는 미국의 상응조치 중 종전선언이 비핵화 과정에서 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다. 북한은 종전선언을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종식의 출발점으로 본다. 한·미연합군사연습의 중단은 가역적(reversible)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재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미국의 생각은 복잡하다.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은 미국이 비핵화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검증과 사찰에 훨씬 못 미친다는 입장이다. 북한이 한 약속은 미래의 핵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북한이 보유한 현재의 핵과 미사일이다. 20~30개로 전문가들이 추정하는 핵탄두와 이동식 발사대에 탑재되어 있는 100개 이상의 미사일은 북한의 약속에 들어있지 않다.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문 대통령은 평양공동선언에 담기지 않은 김정은의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플러스 알파’다.

문 대통령은 이 ‘플러스 알파’를 들고 뉴욕으로 가서 지난 9월 19일 트럼프 대통령과 만났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 과정을 조기에 끝내고 싶어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트럼프도 다른 채널을 통해 그러한 통보를 받았다. 트럼프가 평양공동선언을 아주 훌륭한 것이라고 즉각 환영한 것도 그러한 사실을 미리 통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 대통령이 건넨 북한의 핵·미사일 목록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족시킬 것인지에 비핵화 협상 전체의 운명이 달렸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전달한 김정은의 메시지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해볼만 하다’,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이 곧 평양으로 가서 비핵화 절차를 구체적으로 논의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킨 정도인 것 같다. 북한이 목을 빼고 기다리는 종전선언에 관한 언질은 워싱턴의 그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의 조건으로 요구한 미국의 상응하는 조치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평양은 실망했을 것이고 서울은 말을 아끼고 있다. 종전선언과 상응하는 조치는 미국의 협상 카드다. 그래서 지금 단계에서 밝힐 이유가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폼페이오가 곧 평양을 네 번째 방문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있는 빈에서도 대북 핵협상 대표 스티브 비건과 북한 외무성 부상 최선희가 만나 실무 협상을 시작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킬 무거운 책임까지 지고 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다. 북·미정상회담은 시간과 장소의 결정만 남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6일 미국 중간선거 이전에 김정은 위원장을 미국으로 불러 만나기를 바랄 것이다. 선거에 그 이상 가는 호재가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으로 오기를 바라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보인다.

중간선거에서 미국 의회가 민주당으로 넘어가면 트럼프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정계, 언론계, 학계, 재계의 주류 세력이 반대하는 반자유무역, 반이민 정책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트럼프가 의회의 입법으로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상원에서 2석, 하원에서 23석만 민주당이 늘리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2020년 재선도 위협을 받는다. 김정은이 약속한 대로 비핵화를 트럼프 임기가 끝나는 2021년 1월 안에 완료해야 할 이유다. 2020년 대선에서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가거나 공화당 소속이라도 전통적 방식의 외교를 중시하고 미국 주류의 가치를 존중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한반도 문제를 포함한 트럼프의 정책은 거의 모두 폐기될 운명을 맞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워싱턴으로 가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을 하는 그림을 상상해 보라. 북한과 미국의 70년 적대관계가 ‘종말의 시작(beginning of the end)’을 맞는 그림이다. 연내 종전선언이 가능해지고 트럼프 정부는 유엔에서 미국 내 반대론자들의 저항을 뿌리치고 대북제재 완화나 종식을 주도할 것이다. 무대를 한반도로 옮기면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의 문이 열린다.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길과 육로의 길이 열린다. 문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한반도 신경제지도가 개념 단계에서 실천 단계로 넘어간다. 문화, 스포츠, 지방자치단체, 청년학생 교류의 봇물이 터진다. 영어 표현으로 ‘too good to be true’, 즉, 사실이기에는 너무 좋다.

·70년 적대관계, ‘종말의 시작을 맞는다면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의 군사적 긴장완화는 상상을 초월한 큰 걸음을 떼었다. 남북 국방장관이 서명한 군사분야 합의서는 군사분계선 일대와 동·서해 접경해역에서 군사적인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을 촘촘하게 짰다. 쌍방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상대방의 관할구역을 침범 또는 공격하거나 점령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지상, 해상, 공중에서 남북한 군의 대치 거리를 대폭 늘렸다. 남북 교류협력과 접촉왕래 활성화에 필요한 군사적 보장대책도 세운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긴장완화 조치들을 관리한다.

군사분야 합의서가 제대로 이행되면 한국전쟁 때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백마고지가 있는 철원, 평강고원 등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가 관광명소로 천지개벽할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다. 부산서 경의선이나 동해선을 타고 시베리아횡단철도(TSR)나 중국횡단철도(TCR)와 연결하여 유럽으로 여행을 하는 로망도 꿈은 아니다. 한반도 남반부의 한국인들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한국인들의 의식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내부지향적 반도기질이 대륙지향적으로 확대될 전망을 말한다. 한국의 문학 하나만 봐도 그 스케일이 춘원 이광수의 『유정』을 끝으로 반도의 남반부로 움츠려 들지 않았는가.

5개월에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 6개월에 두 번의 북·미정상회담은 비핵화와 평화 못지않게 한국인들의 시야를 넓히고 큰 꿈을 꾸게 만들고 있다. 남북한의 코리안들은 앞으로는 망망한 대양으로, 뒤로는 광활한 대륙으로 진출하여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떨쳐야 한다. 좁은 한반도에서 주변 4강에 갇혀 아무리 뛰어 봐야 지정학적으로 결정된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정학적 결정론을 극복하는 것이 곧 한반도 평화의 동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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