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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숙청은 북한식 독재체제의 생존방식 2014년 1월호

기획 | 장성택 숙청 … 안개 속 북한
숙청은 북한식 독재체제의 생존방식

김정일 서거 2주기 행사로 2013년을 조용히 마감할 것 같았던 북한에 갑자기 천인공노할 사변이 일어났다. 2인자인 장성택을 특별군사재판정에 끌어내어 사형을 선고한 후, 기관총으로 쏘아죽이고 화염방사기로 태워버린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급변상황을 정변음모라고 불렀다. 장성택과 측근들이 정권을 가로채려고 군사쿠테타를 준비했으나 사전에 진압 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공개한 내용만으로는 장성택 숙청사건의 핵심적인 발생 동기와 원인, 과정을 충분하게 납득하기 어렵다. 북한이 공개하지 못할 내부적인 모순이나 결정적인 동기가 따로 있는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북한 역사상 최대의 정변음모가 왜 김정은 정권에서 일어났냐는 점이다. 출범 2년차 된 정권의 권력장악 및 리더십 미숙에서 기인한 문제인지, 혹은 3대째 권력이 세습되면서 그동안 누적되어 온 북한체제의 본질적인 문제들이 한계점을 다다르면서 드디어 폭발한 것인지 정확한 분석이 필요하다.

권력장악·리더십 부족? 북한체제 한계 도달?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숙청은 정권을 유지시켜주는 핵심적인 작동기재였다. 김일성 시대 대표적인 숙청 사건으로 언급되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의 경우, 김일성의 정치적 반대파인 연안파와 소련파가 결집함으로써 김일성에게 정치적 위기로 다가왔지만 김일성파가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해냄으로써 정치적 반대파를 거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김일성은 그 때 대대적인 숙청놀음을 벌려놓고 반대파들을 형식적인 재판에 부쳐 처형하거나 감옥 또는 산골로 유배했고, 상층부에 대한 숙청이 끝난 뒤에는 ‘중앙당 집중지도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일반 주민들에 대한 숙청을 전개해 ‘반혁명 분자’로 분류된 사람들을 처형, 구속하거나 교화소, 산골로 보냈다. 이러한 대규모 숙청을 마치고 1960년에 개최한 조선노동당 제4차대회는 김일성의 1인지배체제를 출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김일성 빨치산계열의 ‘승리자의 축제’였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역사에 또 한 번 피가 낭자한 대숙청이 있었다. 1967년 갑산파 숙청사건이다. 갑산파는 김일성의 정치적 반대파라고는 볼 수 없으나, 부르주아 사상과 수정주의, 봉건유교 사상들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이 사건과 함께 중앙당에 입성한 김정일은 김일성밖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확고한 사상관점을 가질 것을 강요하는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까지 만들어 냈고, 북한사회를 인간로봇들의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1990년대 중반 진행된 심화조 사건도 6·25당시의 행적까지 들춰내며 무자비한 숙청을 통해 북한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김정일 정권의 공고화에 기여했다. 외부에서 볼 때는 무자비한 피의 숙청이었지만, 북한 역사의 관점에서는 정권을 공고화하고 반대세력이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숙청도 2인자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북한 독재체제의 본성에 역행한 장성택에 대해 김정은이 독재의 칼을 휘두른 결과라 할 수 있다. 김정은은 이번 숙청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넘보면 고모부든, 형제든, 누구도 용서치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김정일 사망 2주기 추모대회에서 북한 간부들이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열렬히 박수를 치는 모습과 살기 띈 눈으로 주석단에 앉아 주변을, 아래를 쏘아보는 독재자의 모습이 대조되어 비춰졌다.

공포 정치는 영원할 수 없다.

북한 이 지난해 12월 12일 특별군사재판을 열어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에 대한 사형을 판결하고 즉시 집행했다고 전한 13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한 시민이 장성택 처형 관련 방송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지난해 12월 12일 특별군사재판을 열어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에 대한 사형을 판결하고 즉시 집행했다고 전한 13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한 시민이 장성택 처형 관련 방송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번 숙청을 불안하게 보는 이유는 김정은이 이번에 독재의 칼을 휘둘러 조성한 공포가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공포만으로 북한주민들을 영원히 짐승처럼 길들일 수는 없다.

김일성의 경우 일제시대 항일무장 투쟁을 거치면서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진 동료집단이 존재했다. 이른바 ‘만주파’로 불리워진 이 집단은 김일성을 대표로 북한 권력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북한 내 권력투쟁 과정에서도 강고한 단결로 김일성을 지지했다.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에서 연안파와 소련파의 도전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김일성을 신념과 의리로 따르는 든든한 동료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경우 김일성 같은 동료집단은 없었지만 긴 권력승계 기간을 거치면서 북한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결정된 1974년 이후 20년 동안 권력승계 기간을 거쳤는데, 김일성이 사망할 무렵에는 거의 모든 권한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김정일 집권 이후 노동당 전원회의 같은 당의 공식기구들이 거의 작동하지 않았던 것은 김정일이 당의 공식기구를 활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은 독재권력의 핵심적 기재들은 그대로 승계 받아 독재체제의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으나, 이러한 구조들을 유지·확장을 실현해 나가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자질과 능력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궁전에서만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친구가 없고, 성격까지 독선적인 김정은이 쉽게 활용하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폭정뿐일 것이다.

따라서 당장의 무시무시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감히 박수를 건성건성 치거나 정면에서 이의를 제기할 측근은 없으나, 그들의 마음을 살 수는 없다. 결국 일정한 시간이 지나 측근들의 진심을 알아차리게 되는 독재자는 과감히 숙청의 칼날을 휘둘러 측근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아첨꾼들을 기용하게 된다. 북한에서 반복적인 정치적 숙청은 1인독재체제의 형성과 유지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흥광 / (사)NK지식인 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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