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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60년 못 봤는데 잠깐 보면 어떡해 … 그럼 만나 봤자야” 2014년 2월호

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11
서병덕·민종혁 할아버지
“60년 못 봤는데 잠깐 보면 어떡해 … 그럼 만나 봤자야”

TS_201402_60 이맘때쯤이면 동네 냇가는 항상 얼었다. 마을 어귀에서 학교까지 이어져 있는 냇가가 얼게 되면 동네 아이들은 모두 신이 났다. 대장간에서 맞춘 스케이트를 타고 학교로 향하곤 했다. 황해도 연백군. 마을 사람 대다수가 건너 건너 친척일정도로 작지만 화기애애한 곳이었다. 임금님도 연백쌀을 먹는다고 할 정도로 평야가 유명한 곳이었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그 곳을 떠나온 지 60년이 되었지만 서병덕(83)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생생히 남아있다.

강화도에 서면 고향이 보인다. 그곳에 서서 닿을 것 같지만 닿지 않는 고향을 그려본다. 고향을 떠나온 그 순간부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년 망향공원에 모여 제사를 지내곤 한다. 저 너머에는 고향이 있다. 저 너머에는 어머니가 있다. 하지만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할 것만 같아 불안하다. “우리 생전에는 고향에 못 갈 거야. 희망이 없어.”

“원래 이남 땅이었는데, 전쟁 후 이북 땅이 됐어.”

해방 후, 인민군은 청년들을 마구 잡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19살이던 할아버지는 강화도로 몸을 피했다. 먼저 피난을 나왔고 아버지는 종종 먹을거리를 옮겨다 주시고는 했다. 연백은 남과 북이 맞닿아 있는 곳으로 양쪽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평화롭던 곳이 단절의 공간이 될 줄은 몰랐다. “억울해. 38선이 그어지고 이남, 이북으로 갈리면서 연백은 이남 땅에 속하는 곳이었는데, 전쟁 후에는 이북 땅이 됐어.” 만약 연백이 남한에 편입되었다면 할아버지는 가족들과 헤어지지 않아도 됐을까? 억울한 마음에 괜한 넋두리를 늘어 놓는다.

연백군을 그리워하는 또 다른 이가 있다. 민종혁(82) 할아버지. 그 역시 고향에 어머니와 동생을 남겨두고 왔다. 3개월이면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고향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그렇게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연백군민회에 청춘을 바쳐 일했다. 하지만 3개월은 1년이 되고, 1년은 또 10년이 되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남겨졌다.

지난 추석 즈음, 200명의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를 선정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기대를 했지만 역시나 명단에 들지 못했다. “나이가 많다거나 사회적 공헌이 있다거나 하면 우선순위를 준대. 지금도 80살이 넘었는데 대체 나이를 얼마나 더 먹어야 상봉 대상자에 들 수 있는 걸까.” 간혹 상봉이 성사된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미국 시민권자인 아무개도 북한을 방문하여 가족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런 소식을 들을수록 마음은 무거워진다. “신청해도 안 될 거야. 대신 만날 날을 위해 건강해야지. 건강하고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네.”

“40명의 동창생, 이제는 6명뿐이야”

TS_201402_61 몇 년 전, 서병덕 할아버지에게 한통의 전화가 왔다. 통일부라고 했다. “서간난을 아세요?” 간난이는 작은 아버지의 딸이었다. 얼굴마저 희미한 간난이와 만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할아버지는 고민에 빠졌다. 결국 그는 거절했다. 사실 오랜만에 듣는 간난이란 이름에 반가운 것이 사실이었지만, 내심 실망하기도 했다. 어머니, 동생들, 식구들 명단을 죄다 적었는데 그들에게서는 왜 연락이 오지 않는 걸까? 헤어질 당시 3살이었던 동생은 지금쯤 환갑 노인이 되었겠지? 살아 있기는 할까? 만약 간난이를 만난다면 식구들 소식을 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시 만날 희망이 아예 사라져 버릴까 만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가족을 만난다면 고향에서 만나고 싶다. 금강산 같은 데서 잠깐 보는 게 아니라 정말 예전처럼 가족들이 고향에서 만나 도란도란 정을 나누고 싶다. “60년을 못 봤는데 잠깐 보면 어떡해. 그럼 만나 봤자야.”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보통 가족들처럼 한 집에 모여 따뜻한 식사와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싶다. 왜 다른 가족들에게는 허락된 지극히 평범한 하루가 할아버지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걸까.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지도 모르니 원통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는다.

“다음 주에는 동창회를 해. 이남에 있는 우리 학교 출신이 40명이나 되더라고. 근데 이제 6명밖에 안 남았어.” 6명이 조촐한 동창회를 하겠지만 이렇게라도 계속해서 친구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가물가물한 고향 모습을 이 친구로 하여금 함께 한 추억을 떠올리며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북의 가족들과 고향을 잃은 허전함을 달랠 수 있기도 하다.

30만 군민의 연백군. 처음에는 연백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이,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고향땅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그리움을 접어둔 채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매년 망향제를 지낼 때면 버스가 줄어든다. 처음 15대 가량 되던 버스는 지난해 4대로 줄었다. “원래 군민회는 통일이 될 때를 대비해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었어. 다들 고향에 갈 줄 알았는데, 곧 통일이 될 줄 알았는데 시간이 너무 흘렀지.” 민종혁 할아버지는 하도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많아 이제는 처음 작성해 두었던 연백군민회 명단 정리조차 힘들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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