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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 스토리 | 버스는 쿵쿵 내 사랑은 반짝 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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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 스토리 38 | 버스는 쿵쿵 내 사랑은 반짝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으로 현재 서울에 정착해 살고 있는 최성용 씨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군에서 제대하여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한 최성용의 집은 평양시 선교구역 등매2동이었다. 거기서 종합대학까지 가려면 송팔행 버스를 타고 선교에 와서 다시 대동강역 합장교행을 갈아타야 한다. 당시로 말하면 매일 아침 9시면 대학에서 충성선서를 하던 때였다. 어떤 경우라도 선서에 빠지면 사상문제로 안 좋은 일이 생긴다.

“정말 내릴 거지요?” … “속고만 살았소?”

그날도 성용은 아침에 일어나기 바쁘게 밥을 먹고 책가방을 챙겨들고 버스정류소로 나갔다. 처음엔 종점이어서 타는 게 수월했지만 선교에 와서 합장교행을 갈아탈 땐 문제가 달랐다. 버스 줄이 100m는 족히 되었고 줄반장까지 여럿 나서서 질서를 세운다. 새치기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버스 줄이 곧바르지 않고 둥글뭉실하면 일단 버스가 왔을 때 순서가 뒤섞이게 되고 그 틈에 조금만 날래게 움직이면 얼마든지 끼여 탈 수가 있는데 그날만은 어찌나 줄을 곧게 섰는지 도대체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마침내 버스 한 대가 왔다. 줄이 흐트러지기는 커녕 아주 질서정연하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시계를 보니 벌써 8시 20분. 이제 못 타면 틀림없이 충성선서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생활총화에서 호된 비판을 받게 된다.

두 번째 버스가 왔다. 워낙 콩나물시루 같이 사람을 태우고 오던 버스는 불과 몇 사람을 태우지 못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는 죽더라도 이판사판이다.’ 몸이 단 성용은 달리는 버스를 따라 뛰며 문에 매달렸다. 그 순간, 문이 닫히는 통에 그만 가방 든 한쪽 팔과 발 한 개만 겨우 버스를 탔다. 그쯤 되자 버스 차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선생님, 왜 하필 그곳에…’

TB_201404_35 “아니 손님, 지금 제 정신이에요! 내려요, 내려. 당장 내리지 못하겠어요!” “그래, 알았소. 내리겠으니 어서 문 열어 줘.” “정말 내릴 거지요?” 버스 차장 여자가 못 미더워선지 다시 묻는다. “아 내린다니까. 나 제대군인이요. 한 번 내린다 말했으면 무조건 내린단 말이요.” “정말 내려야 해요.” “사람을 믿어 봐 속고만 살았소?” 픽, 피익- 압축공기가 새며 버스문이 스륵 열린다. 허나 내리기는 뭘 내리는가. 그 순간을 빌어 성용이 날쌔게 머리와 몸을 들이 밀었다.

책가방 든 손으로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성용은 이리 밀고 저리 밀리며 간신히 계단 위 에 올라섰는데 더 이상 움직일 틈이 없이 사방에서 꽉 조여들었다. 그 순간 뭔가 뭉클한 접촉이 있어 그때서야 마주선 사람을 보는데, 이것 참 하필이면 웬 여자와 정면으로 맞대고 서게 된 것이다. 때는 여름인데다 갓 전투(?)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선터라 헐떡이는 숨까지 그대로 뿜어낸다. 성용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얼굴이 익어 다시 보니 이런, 성용이 공부하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여선생님이 아니신가.

성용은 군복무를 십 년 가까이 한 후 대학에 왔고 그 여선생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교원이 되었으니 나이로 말하면 성용이가 한 참 위다. 평소에 은근히 ‘참 젊고 예쁜 선생님이시구나.’ 하고 선망의 눈길을 보냈던 것도 사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빽빽한 버스 안에서 마주대고 있게 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역시나 여선생님도 성용을 알아 본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그 선생은 머리를 저쪽으로 돌리고 성용은 이쪽으로 틀어 민망함을 피해보려는데 버스가 도로의 요철에 쿵쿵 뛰면서 승객들이 이리저리 휘둘릴 때면 여지없이 주위가 압박해 와 서로 더 밀착되는 것이다. 민망하고 시간은 또 너무나 더디게 가는 듯하여 성용은 마음속으로 용진가를 불러보기 시작했다. “동무들아 준비하자 손에다 든 무장 제국주의 침략자를 때려 부수고” 하지만 또 버스는 쿵쿵.

너무 황급해 멀거니 선생님을 내려다보는데 선생님도 민망한 듯 웃는다. 땀에 물든 얼굴은 빨갛게 물들고, 손을 움직여 뭘 어떻게 해보려 해도 워낙 많은 사람 속에 끼다보니 가방 든 손을 내릴 수도 없었다. 얼굴이 뜨거워지다 못해 아예 불을 때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참 오묘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 성용은 러시아어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항상 성적은 늘 만점이었고 결국 졸업 후에 두 사람은 단란한 가정을 이뤘단다. 그때 그 만원버스의 추억을 즐겁게 회고하며 성용 부부는 오늘 날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지명 / 계간 (북녘마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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